야구
[마이데일리 = 윤욱재 기자] '응답하라 1994'의 신촌 하숙집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서울 쌍둥이'의 성동일 코치 가족들과 더불어 연세대 94학번 새내기들이 가득하다.
1984년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실제로는 이만수 수상)를 차지한 성동일 코치는 1994년 서울 쌍둥이의 우승과 함께 한다. 포수 출신인데 3루 주루코치를 보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야구 실력의 소유자인가. 나정이 엄마(이일화)는 야구가 곧 인생인 성동일 코치를 위해 하숙생들을 출신지에 빗대 '해태', '빙그레'라는 별명을 붙여 부른다.
1993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서 7연속 경기 완봉승을 거둬 '칠봉'이란 별명을 가진, 혹은 김재준일지도 모르는 '칠봉이'는 당시 대학 최강이었던 연세대에 입학해 '제 2의 선동열' 임선동과 함께 마운드를 이끈다. 실제 연세대에서 뛰었던 박재홍, 조인성, 문동환 등 주축 선수들이 극중에 등장한다.
'응답하라 1994' 속에 비친 한국야구는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 그래서 더 재미를 더하는지도 모른다.
▲ '서울 쌍둥이' LG 트윈스가 남긴 전설
'서울 쌍둥이'는 누가 봐도 LG 트윈스의 이야기다. LG는 1994년 자율야구와 신바람야구로 프로야구를 제패했다. 1993년 겨울, '미스터 LG' 김상훈을 해태로 보내고 '해결사' 한대화를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진 LG는 걸출한 신인인 유지현과 김재현이 입단했지만 전력 면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개막 6경기 만에 무명 신인이 '대형 사고'를 쳤다. 서용빈이 그 주인공. 유지현과 김재현은 아마 시절에도 주목 받는 유망주였지만 서용빈은 철저한 무명이었다. 그런데 그 무명의 신인이 4월 16일 롯데를 상대로 '사이클링 히트(Hit For Cycle)'를 쳤다. 서용빈은 3번 타순에 자리했고 유지현-김재현-서용빈으로 이어진 '초강력 1-2-3번'에 '해결사' 한대화가 4번, '검객' 노찬엽이 5번을 쳤다. 김동수가 지킨 안방은 물론 골든글러브 2루수 박종호까지, LG는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투수력이 달렸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상훈-정삼흠-김태원으로 이어진 15승 트리오에 30세이브를 거둔 마무리투수 김용수가 버텼다. 선동열도 이긴 신인 인현배와 셋업맨 차동철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신바람야구'의 완성엔 이광환 감독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받으며 선진화된 시스템 야구를 익혔다. 선발 로테이션 정착 등 철저한 투수 분업화에 나섰다. 당시엔 완전히 자리잡지 않은 선발투수예고제에도 동참했다.
LG는 이른바 '선진 야구' 속에 '시대를 앞서가는 팀'으로 조명받았다. 세련된 줄무늬 유니폼 속에 혁신된 구단 경영과 팬 서비스 등 다른 구단과 차별화됐다. 4월 초부터 선두로 치고 나간 LG는 시즌 끝날 때까지 1위를 내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독주였다.
역시 그해 돌풍을 일으킨 태평양과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LG는 1차전 11회말에 터진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으로 먼저 이겼다. 이 경기는 사실상 우승의 향방을 가른 것이나 다름 없었다. LG는 파죽지세로 4연승을 거두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10월 23일 인천 도원구장에서 열린 4차전의 마지막 순간, 김용수가 김성갑의 땅볼을 잡고 두 팔을 들어올리는 모습과 '신인 3인방'이 뒤엉켜 환호하는 장면은 지금도 LG 팬들을 짜릿하게 한다.
▲ '칠봉이'의 연세대, 최강은 아니었다
'칠봉이'가 입학하기 직전, 연세대는 1993년 대학야구 3관왕에 빛나는 최강의 팀이었다. 1994년에도 연세대의 독주는 계속되는 듯 했다. 춘계리그에서 문동환-임선동 콤비를 앞세워 영남대를 꺾고 결승에 진출한 연세대는 결승전서 6회초 안희봉과 조인성의 적시타로 3점을 올려 동아대를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임선동은 2회부터 등판해 9회까지 틀어 막았다.
그러나 연세대의 독주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세출의 투수'로 각광받던 임선동은 대통령기 준결승전에서 홍익대의 문희성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말았다. 우승은 고려대의 몫이었다. 임선동의 라이벌인 조성민과 2년생 손민한이 있었다. 타선엔 홍원기가 버텼고 새내기 김동주도 있었다.
연세대는 고려대의 약진에 고전했다. 고려대와의 정기전에서도 완벽하게 밀렸다. 고려대는 손민한이 8이닝 4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 임선동과 문동환이 나선 연세대에 7-0 완승을 거뒀다. 철저히 연세대를 괴롭힌 손민한은 그해 아마야구 MVP에 선정됐다.
연세대는 추계리그마저 잡지 못했다. 연세대에 들어올 뻔했던 김재현이 신인 최초로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한 날, 연세대는 추계리그 준결승전에서 홍익대에 밀려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사실 '칠봉이'는 한국 야구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허구의 인물이다. 칠봉이가 졸업한 휘문고는 1993년 봉황대기 고고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사실이 없고 한국 야구 역사를 돌이켜 칠봉이와 '매치'되는 인물이 전무하다.
▲ 성동일 코치의 '기막힌' 예지력 검증
'서울 쌍둥이'가 대망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성동일 코치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우승주'를 직접 제조한다. 아내로부터 핀잔을 들으면서도 꿋꿋이 '우승주'를 제조한 성동일 코치는 머지 않은 미래에 있을 일들을 직접 예상하기도 한다. 성동일 코치의 '예언'들은 정말 기가 막혔다. 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기가 막힌다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아따, 이 사람아. 인자 자율야구가 꽃을 활짝핀디. 그리고 우리한테는 젊은 피 3인방이 있잖애. 유지현이, 서용빈이, 김재현이, 이 3명이 딱~ 버티고 있잖애. 한번 우승 꼴랑 해갖고는 팬들도 성이 안 찬당께. 내가 볼땐 내년에는 무조건 우승이여. 우승 못 하잖애? 나 성 바까부네"
성동일 코치가 성을 바꿨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LG는 2년 연속 우승에 아깝게 실패했다. 1995년 8월 27일, LG는 OB에 6경기차로 앞선 1위였다. 그러나 이후 20승 7패를 거둔 OB에게 역전 우승을 내줬다.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섰지만 3위 롯데에 2승 4패로 밀렸다. 개천절에 열린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20승 야생마' 이상훈이 강성우에게 3점포를 내준 것은 LG 팬들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안타깝게도 LG의 마지막 우승은 아직도 1994년으로 기록돼 있다.
"아따, 선동열이 서른 넘어갖고 인자 내리막이여. 이 사람은. 지가 무슨 일본을 가네, 주니치를 가네? 하이고~ 내가 볼땐 절~대로 못 가네 일본"
당시 성동일 코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선동열에게 1994년은 최악의 한 해였다. 생애 가장 높은 평균자책점인 2.73을 기록했다. 요즘엔 2점대 평균자책점만 기록해도 에이스란 소리를 듣지만 선동열에겐 2점대 평균자책점은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개막 초반부터 두들겨 맞았다. 류중일에게 무려 '만루홈런'을 내주기도 했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류중일 만루포 폭발'이 아닌 '선동열 만루홈런 허용'이란 타이틀로 소개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마 성동일 코치가 선동열의 내리막을 예견한 건 9월 8일에 있었던 경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백업 포수 김정민이 선동열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날리는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그러나 1995년, 선동열은 완벽하게 부활했고 이듬해 '절대로 못 간다던' 일본을 갔다. 입단 첫 해엔 적응기를 보내느라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1997년부터는 주니치의 수호신으로 자리했다.
"이종범이 이제 갓 시작한 풋내기여. 걔 이제 1년 잠깐 반짝하다가 만다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사실 이종범의 1994년은 '1년 잠깐 반짝하다가 말 선수'가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타율 .393, 196안타, 84도루를 남겼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와중에 홈런도 19개를 날렸다는사실. 홈런 부문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4할 타율-200안타에 모두 근접했던 선수는 이종범이 유일하다. 선동열이 주니치로 떠나고도 해태가 1996, 1997년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종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7년에는 30홈런-60도루란 또 한번의 전설의 시즌을 일궜다.
"당분간은 우리 서울 쌍둥이의 독주 체제여. 10년 간은. 10년 간은 가을야구 가네. 이 사람 알지도 못하면서. 인자 이 성동일이 인생이 활짝 피는거여"
사실 LG는 1994년 이후에도 독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강팀의 면모는 꽤 유지했다. 1995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지만 천보성 감독 체제로 거듭난 1997년과 1998년에는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다만 우승만 못 했을 뿐이었다. 2000년에는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이광은 감독을 필두로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두산에 거짓말 같은 역전극을 당했다. 김성근 감독 체제로 거듭난 2002년에는 끝내 삼성에 패했지만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이후 믿을 수 없는 10년 간의 암흑기가 도래한 LG는 2013년 마침내 가을야구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젠 1994년의 '응답'도 머지 않아 보인다.
[LG 트윈스 우승 장면(첫 번째 사진), 우승주를 담그고 있는 성동일 코치(오른쪽). 사진 = LG 트윈스 제공, '응답하라 1994' 캡쳐]
윤욱재 기자 wj3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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