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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온라인뉴스팀] 로렌 바콜은 1944년 처음 영화에 데뷔할때 관능적 섹시미를 보여주었지만, 나중에는 세련되고 또 때로는 냉혹하고 이지적인 이미지로 진화돼 약 60년간 할리우드 스크린을 누볐다.
美 피플은 로렌 바콜과 험프리 보가트의 공동 유산관리인인 매니저 로버트 드 클러크가 "로렌 바콜이 뉴욕 자택에서 오늘(12일)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고 당일 보도했다. 그녀와 보가트 사이의 아들 스티븐 보가트도 이 비극적 뉴스를 확인했다. 사인은 치명적 뇌졸중으로 알려졌다. 향년 89세.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로렌은 19세때 '하퍼스 바자' 커버 모델로 연예활동을 처음 시작했다. 이때 본명은 베티 조안 퍼스크. 뉴욕시 유태 이민자의 딸로 태어나 드디어 1943년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한다.
연기경험이 부족한데도 불구, 이 날씬한 10대 소녀는 우아하고도 묘한 매력으로 당대의 명감독 하워드 혹스의 마음을 뺏어 카메라 테스트에 합격하고, 로렌 바콜로 개명했다. 데뷔작은 헤밍웨이 소설을 각색한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로 하워드 혹스가 감독했다.
이 영화에서 상대역은 25세 연상의 험프리 보가트로 둘은 운명적인 첫만남을 갖는다. 영화속에서 바콜이 하는 "휘파람 불 줄 아세요 스티브? 입술을 모으고 부세요(You know how to whistle, don't you. Steve? You just put your lips together and blow.)"하는 대사는 당대 젊은 영화팬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로렌 바콜과 험프리 보가트는 이후 '키 라르고' 등 여러 영화를 같이 찍었으며, 드디어 1945년 5월 험프리 보가트가 세번째 아내와 이혼한 직후 오하이오의 친구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3년후 아들 스티븐('소유와 무소유'에서 보가트 역할명)을 낳았으며, 1952년 딸 레슬리(보가트 절친인 배우 레슬리 하워드의 이름을 딴)도 얻었다.
하지만 1956년 보가트는 식도암 진단을 받고 바콜이 지극정성 간호했으나 1957년 1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33세였던 바콜은 평생 연인의 죽음에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황폐해졌다.
이후 그녀는 당대 플레이보이 스타였던 프랭크 시나트라와 짧게 연애했으나 곧 헤어졌고, 연기파 배우 제이슨 로바즈와 1961년 결혼, 나중 배우가 된 아들 샘 로바즈를 낳았다. 하지만 제이슨 로바즈의 폭음 문제 때문에 1969년 이혼했다.
바콜은 1950년대말 할리우드를 떠나 뉴욕으로 이사,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진출했다. 그녀는 쉰 듯한 거친 목소리에도 불구, 뮤지컬 '어플로즈(Applause)' '우먼 오브 더 이어'로 토니상을 받기까지 했다.
영화제작자들은 로렌 바콜이 아카데미상을 받거나 후보에 오른적이 없어도,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 돈 시겔 감독에 존 웨인과 촬영한 '마지막 총잡이(The Shootist, 1976)에서 죽어가는 총잡이 존 웨인의 미망인 역은 바콜 매력의 백미다.
바콜은 2010년 美 영화예술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평생 업적상(Life Achievement Award'을 받았다.
[배우 험프리 보가트-로렌 바콜(첫째 둘째사진). 마릴린 먼로-로렌 바콜-베티 그레이블(맨 아래사진).(사진 출처 = 영화 '소유와 무소유'(1944) 스틸컷, 영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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