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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여동은 기자]쇼트트랙, 세월이 흘러도 강 훈련만큼은 변함없다
1998나가노동계올림픽 여자쇼트트랙 1000m 결승. 경기중반까지 최하위(4위)로 쳐져있던 전이경(34)은 마지막 코너에서 절묘하게 인코스로 파고들어 결승선을 앞두고 오른발을 쭉 내밀었다. 대역전극으로 일궈낸 금메달. 경기 후 인터뷰에서 전이경은 "끊임없이 훈련한 발 내밀기 동작이 무의식 중에 나왔다"고 설명했다. 쇼트트랙은 가슴이 먼저 골인지점을 통과해야 하는 육상과 달리, 스케이트 날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순위를 매긴다. 한국쇼트트랙은 결승선 통과 시 날을 앞으로 들이미는 기술을 집중 연마했다. 이제는 세계쇼트트랙의 교본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만의 전매특허. 한국쇼트트랙은 '날 들이밀기' 뿐만 아니라, '호리병 곡선주법'과 '바깥 돌기' 등 끊임없이 선진기술을 개발하며 세계최강의 자리를 지켰다. 1992알베르빌 동계올림픽부터 5번의 올림픽에서 딴 메달만 31개(금17개·은8개·동6개)다.
'호리병 곡선주법'은 코너를 돌아 나올 때 상대가 원심력 때문에 빈틈을 보이면, 레인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다시 코너 바깥쪽으로 나오는 기술이다. '바깥돌기'는 경쟁이 치열한 인코스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가속도를 붙여 아예 바깥쪽으로 크게 회전하는 기술. 두 기술 모두 상대보다 더 긴 거리를 주행해야 한다. 선진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체력훈련이 필수였다. 전이경은 "무의식 중에"라는 표현을 썼다. 훈련의 성과는 기억이 아니라 신경에 저장된다. 체화를 위해서는 반복 숙달만이 살길. 그래서 영광의 순간을 위한 준비기는 한 없이 지루하다.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한국쇼트트랙은 이미 한국만의 비기(秘技)들이 전 세계로 퍼져있는 상황에서 경기를 치른다. 체력훈련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쇼트트랙대표팀은 오전5시부터 강 훈련을 소화한다. 1992알베르빌동계올림픽과 1994릴리함메르동계올림픽에서 남자쇼트트랙 1000m를 2연패한 김기훈 감독은 "사이클 같은 유산소 운동은 물론, 1시간 동안 계속되는 장거리 러닝도 매일 한다. 세월이 흘러도 강 훈련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것이 자신감의 원천이다."라고 말한다.
'부담백배' 이호석, 꿈속에서도 이미지트레이닝
2008베이징올림픽 전의 일이다. 올림픽에서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는 A선수가 체육과학연구원(KISS)에 심리상담을 요청했다. A의 고민은 "금메달을 목표로 4년 간 땀을 흘려왔는데 최근 꿈속에서 계속 숫자 2가 보여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상담자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환기시켰다. "숫자 2를 꼭 2등과 연관지을 필요가 없다"는 답변이었다. 시상식에서 2번째로 입장하는 선수는 바로 금메달리스트기 때문이다. 그제야 A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A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전 메달유망주들의 심리상태가 얼마나 불안한지를 알 수 있는 일화다. 2006토리노올림픽 남자1000·1500m은메달리스트, 남자계주 5000m금메달리스트 이호석(24·고양시청)은 "쇼트트랙은 당연히 금메달이라는 국민들의 정서가 가장 부담스럽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예전보다 전력이 약하다'는 평가와 '그래도 금메달'이라는 기대가 상충하면서 마음의 짐은 더 무거워졌다. 한국은 여전히 전 세계의 표적이다. 지도자들은 "심판들이 특히 한국선수들에게 더 까다로울 수 있으니 모든 것을 더 완벽하게 하라"고 주문한다. 온통 극복해야 될 것들뿐이다.
이호석은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가끔씩은 꿈속에서도 스케이트를 탄다"고 했다. 쇼트트랙은 스피드스케이팅과는 달리, 순위 싸움이기 때문에 경기 중 가변적인 상황이 많다. 빈틈을 보이면 순간적으로 끼어드는 선수들도 있고, 여러 선수들과 엉켜 넘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훈련 속에서 모든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익히기란 쉽지 않다. 실전경험이 중요한 이유다. 대다수 선수들은 심상훈련(이미지트레이닝)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체육과학연구원(KISS)의 심리전문가 신정택 박사는 "꿈속에서 경기 장면이 나온다는 것도 무의식적인 심상훈련(이미지트레이닝)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고도의 경기력을 지닌 선수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 상황을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선수들의 기술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언제 치고 나갈지에 대한 판단력이 메달 색을 결정한다. 성시백(23·용인시청)은 "그 짧은 타이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고 했다. 잘못된 판단 하나로 실격을 당하기도 하고, 역전을 당하기도 한다.
상대선수의 성향 분석도 중요하다. 일부 악질적인 선수들은 한국선수가 파고드는 순간, 일부러 부딪히거나 할리우드 액션을 취해 실격을 유도한다. 2002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 김동성(30)이 안톤 오노(28·미국)에게 당한 것이 예다. 지저분한 플레이로 소문이 난 오노는 한국 뿐 아니라 타국 선수들에게도 경계대상 1호. 대표팀에서 가장 국제 경기경험이 많은 이호석은 "상대에 대한 분석은 이미 끝났다"면서 "2006토리노동계올림픽 개인전에서는 은메달만 딴 것이 도리어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성시백, 2006년과 2007년의 눈물을 턴다
성시백은 이번이 첫 올림픽 출전이다. 2006토리노동계올림픽과 2007창춘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대표선발전에서 탈락했다. 아쉬움이 짙어질까봐 4년 전에는 TV중계방송조차 보지 않았다. 성시백은 "요즘 올림픽특집프로그램에서 4년 전 경기들을 처음 본다"고 털어놓았다.
성시백은 2006토리노동계올림픽 3관왕 안현수(25·성남시청)와 절친한 사이. 올림픽 이후 안현수와 함께 다니면, 안현수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을 많았다. 그 때 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실감했다. 가슴 한편에 자리 잡는 부러운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충분히 대표선수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좌절은 더 컸다. 2007동계아시안게임 선발전 이후에는 운동을 그만 둘 생각까지 했다. 술잔 곁에는 눈물이 쌓였고, 눈물은 또 술잔을 불렀다. 성시백의 어머니 홍경희씨는 "어릴 적부터 몸도 마음도 다 여린 아이여서 더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다시 스케이트 끈을 조여 맨 지 수개월. 잠깐의 웅크림은 더 큰 탄력의 예비기였다. 성시백은 2008년 10월, 국제빙상경기연맹 제1차 쇼트트랙 월드컵 500·1500m와 5000m계주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후 제4차 월드컵에서도 500m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한국이 전통적으로 취약한 500m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본인 역시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500m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한국은 스타트에서의 약점 때문에 쇼트트랙에서 최단거리인 500m에서 고전해왔다. 동계올림픽 금메달은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 채지훈(36) 뿐이다. 성시백은 "연세대 동문인 채지훈 선배가 나를 볼 때마다 '500m금메달은 꼭 네가 따라'고 압박을 하신다"며 웃었다.
이호석과 성시백. 한국남자쇼트트랙의 쌍두마차는 "개인전 금메달도 좋지만, 개인전을 못 따도 계주를 따면 기분이 다 풀린다"고 했다. 동료들이 얼마나 고생한 지 누구보다 잘 아는 쇼트트랙 선수들. 모두의 목에 금메달이 걸려있지 않다면, 개인전에서 잘했다고 함부로 기쁜 내색을 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개인전 종료 후 열리는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면, 개인전 패배의 아픔은 희석된다. 동료이자 라이벌인 둘에게 레이스 운영에 대해 묻자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직은 비밀"이라며 웃었다. 한국선수에게도 역시 가장 무서운 적은 한국선수.
이미 올림픽 출전 경험이 있는 이호석은 "역시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특히, 쇼트트랙은 상대선수와의 가벼운 충돌로도 경기를 그르칠 수 있다. 부모들의 생각도 마찬가지. 요즘에는 치성을 드리는 일도 잦아졌다. 이호석의 어머니 한명심씨는 "(성)시백이 어머니와 절에서 만난 적도 있다"며 웃었다. 그렇다면, 왜 새벽 5시반부터 그 힘든 운동을 견뎌냈을까. 이호석의 입에서 명답이 나왔다. "물론 금메달은 하늘이 내리지요.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잖아요."
여동은 기자 deyuh@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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