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종합
[마이데일리 = 최창환 기자] 지금은 수많은 프로스포츠나 여가시간을 즐길 문화가 생겨 관심이 크게 줄었지만, 한때 권투는 국민들을 대리만족시켜주는 ‘국민스포츠’였다. 특히 장정구(55)는 한국 권투선수 가운데 누구도 밟지 못했던 고지를 정복,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포츠영웅으로 꼽힌다.
현역으로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 후 약 27년이 흘렀다. 장정구는 종종 대중에게 근황을 전해왔다. 2000년 WBC(세계복싱평의회)가 선정한 ‘20세기 위대한 복서 25인’에 이름을 올렸고, 한때 故 최요삼의 트레이너도 맡았다. 2009년에는 프로복싱기자협회가 선정한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기도 했다.
또한 한국 권투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인드도 그대로였다. 자나 깨나 권투만 생각해왔고, 권투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장정구는 ‘천생 권투인’이었다.
▲ “후회 없다. 하지만…”
부산 출신 장정구는 어릴 때부터 당돌했다. 2월에 태어나 초등학교에 빨리 입학한 장정구는 동급생보다 나이가 어리고 체구도 작았지만, 친구들과의 싸움에서 물러선 적은 없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때리고 다녔지 맞고 다닌 적은 없었다”라는 게 장정구의 설명이다.
친구들과 다투면 끝장을 볼 각오로 싸웠던 장정구의 인생은 우연치 않게 접한 권투경기로 180도 바뀌었다. “1975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TV에서 중계된 김현치와 벤 빌라플로의 슈퍼페더급 타이틀전을 보며 권투의 매력에 빠졌다. 그 길로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고 권투를 배울 수 있는 체육관에 들어갔다. 만 12세 때의 일이었다.” 장정구의 말이다.
장정구의 성장세는 대단했다. 체육관 선배들은 체구가 작지만 습득이 빠른 장정구의 잠재력을 예의주시했다. “권투를 처음 시작할 때 몸무게가 38kg이었다. 키도 작은 녀석이 훈련을 잘 따라오니 (선배들도)기특하게 여겼던 것 같다.” 장정구의 말이다. ‘짱구’라는 별명도 그때 만들어졌다. 단순하지만, 장정구라는 이름에서 착안된 별명이었다.
펀치력과 승부근성으로 무장한 장정구는 1982년 9월 일라리오 사파타를 상대로 치른 WBC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이는 대반전 드라마를 위한 예고편이었다. 장정구는 약 6개월 뒤 다시 맞붙은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3회 TKO 승을 따내며 세계챔피언으로 등극했다.
장정구는 이후 탄탄대로를 걸었다. 1988년 오하시 히데유키에 8회 TKO승을 거둬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15차 방어라는 역사를 썼다.
장정구는 “만약 1982년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이겼다면, ‘짱구’도 없었을 것이다. 엄청 분하더라. 복수하기 위해 하루에 3~4번씩 영상을 돌려보며 나와 상대의 장단점을 분석했다. 결국 권투는 습관이다. 반복 훈련 속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재대결을 준비했고, 이길 수 있었다. 첫 경기에서 이겼다면, 5년 4개월 동안 타이틀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순탄할 것만 같았던 장정구의 권투 인생은 15차 방어에 성공한 이후 꼬였다. 전처와 이혼하는 과정을 밟아 온전히 권투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스스로 타이틀을 반납했다.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일련의 절차가 마무리될 때쯤인 1989년, 장정구는 현역 복귀를 선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는데, 다른 직업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권투뿐이었다”라는 게 장정구의 설명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짱구’는 없었다. 1989년 12월 움베르토 곤잘레스와의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패한 장정구는 이후 소트 치탈라타(1990년), 무앙차이 키티카셈(1991년)과의 대결에서도 패했다. 결국 한때 세계권투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장정구는 무앙차이 키티카셈과의 경기에서 KO패를 당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워낙 혹독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장정구는 은퇴 후 그 흔한 조깅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운동을 멀리 했지만, 권투를 택한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권투 안 했으면 건달 됐을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누군가는 ‘칠성파를 뛰어넘는 팔성파를 거느리는 두목이 되지 않았겠냐’는 농담도 한다. 내가 세계협회로부터 언제 상을 받아보겠나. 권투를 택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영예다.” 장정구의 말이다.
다만, “정도(正道)만 걸어왔다”라고 자부하는 장정구도 아쉬움을 곱씹는 순간이 있었다. 장정구는 “선수로 복귀하면 안 됐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 돌아오니 몸이 예전 같지 않더라. ‘내 펀치가 통할까?’라는 걱정을 많이 했다. 0.001초에 승부가 갈리는 권투경기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세계 챔피언의 영예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며 당했던 굴욕. ‘영원한 챔피언’으로 남길 바랐던 장정구가 아쉬움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 “30년 뒤에 보세요”가 남긴 여운
서두에 언급했듯, 장정구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종종 권투와 관련된 소식으로 올드 팬들에게 근황을 전했다. 최근까지 체육관을 운영, 권투의 대중화를 위해 힘쓰기도 했다.
사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권투의 저변은 크게 약화됐다. 구기종목의 프로스포츠화가 단계별로 이뤄졌고, 2000년대부터는 대중들이 여가활동으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보다 다양해졌다.
장정구의 진단은 보다 냉철했다. “권투인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화려했던 한국 권투의 명맥은 끊긴지 오래”라고 운을 뗀 장정구는 “한국에서 권투가 인기 있던 시절에는 관련 협회가 KBC(한국복싱협회) 단 하나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수익을 이유로 협회가 4~5개까지 늘어났고, 결국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단체로 변질됐다. 돈, 돈, 돈만 쫓다 보니 대중들도 권투를 멀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라고 덧붙였다.
사실 권투는 운동을 즐기는 마니아들에겐 여전히 인기 있는 스포츠다. 어마어마한 운동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위해 권투를 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배우 장혁도 유명한 ‘권투 마니아’다. 하지만 엘리트코스로 시선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장정구 역시 필자에게 “자식 있으면 권투 시키겠는가?”라며 반문한다. 그리곤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사람들은 여전히 권투를 배고픈 이들이 ‘헝그리정신’으로 하는 운동이라 여기고, 남들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한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골프 치는 사람이 많은 나라였는가. 협회가 계속 분산된 상태로 운영된다면, 권투는 절대 인기를 회복할 수 없다. 예전과 같이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보여주는 선수가 나올 수도 없다.” 장정구의 말이다.
사실 장정구를 만난 것은 화려했던 그의 선수시절을 재조명하기 위함이었지만, 권투의 저변확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권투를 사랑했던 장정구에게선 이와 관련해 단호한 코멘트만 들을 수 있었다.
선수로 복귀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할 때보다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장정구가 남긴 “30년 후에 잘 봐라. 지금보다 더 대중에게서 단절된 한국 권투의 현실과 마주할 수 있다”는 유독 여운이 짙게 남는 한마디였다.
[장정구. 사진 = 최창환 기자 maxwindow@mydaily.co.kr, 마이데일리DB]
최창환 기자 maxwindow@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