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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여동은 기자] {정찬 소설가 이세돌의 감각}
바둑은 기록된 역사만으로도 2500년이 넘는다. 바둑을 사랑하는 어떤 시인은 인류 역사에서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스타크래프트’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1998년 한국에 출시되어 게임 산업을 주도했던 스타크래프트의 불꽃은 18년 만에 소진되었다. 그가 바둑을 스타크래프트와 비교한 것은 둘 다 전략적 시뮬레이션 게임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한 종류인 바둑이 불멸에 가까운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게임들이 갖지 못한 ‘무엇’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한’이다.
바둑에서 경우의 수는 10의 170승으로 알려져 있다. 바둑에서 구사할 수 있는 조합과 배열이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은 것이다. 바둑 기사가 돌 한점을 놓는다는 것은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가 된다. 바둑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을 무한 앞으로 끌어들이는 신묘한 놀이인 것이다. 이 놀이 속에 예술의 얼굴이 깃들어 있는 것은 무한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서양의 체스가 수학에 기반을 둔 유희라면, 동양의 바둑은 철학을 바탕에 둔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둑에 깃든 무한을 직관했기 때문일 것이다.
2016년 3월9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5번기 결과 알파고가 4승 1패로 이겼다. 이세돌은 대국 전 “인공지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인간의 직관과 감각을 따라오기 어렵다고 보기에 이길 자신이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으나 세 판 연달아 졌다. “사람이 생각하기 힘든 승부수를 두는 데 놀랐다”고 말한 그는 4국에서 마침내 이겼으나 5국에서는 다시 졌다.
인간과 기계가 무대에 오른 이 기이한 상황극을 인류사의 전환기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간과 문명의 대결 차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구글은 알파고의 실험 대상으로 바둑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바둑이 지닌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가 인공지능에게 매력적인 도전 과제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국이 끝난 후에는 “이세돌에게서 알파고의 업데이트에 필요한 소중한 자료를 얻었다”고 밝혔다. 대회 기간 동안 구글의 시가 총액이 58조원가량 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세돌은 무엇을 얻었을까?
지난달 19일 이세돌은 한국기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24년4개월간의 프로기사 생활을 청산한 것이다. 27일 <교통방송>(tbs) ‘뉴스공장’과 은퇴 후 첫 인터뷰를 한 이세돌은 “세상에서 내가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존재라는 자존감이 알파고와 대국 후 무너졌다. 아무리 잘 두어도 인공 프로그램은 못 이길 것 같다는 느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프로기사들이 바둑을 인공지능한테 배운다. 프로그램이 어떻게 두는지를 보고 따라 두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든다. 나보다 더 엄청난 고수에게 배운다면 그분의 기풍과 인간적 면모도 배울 테니 당연히 기쁠 것이다”라고 한 뒤 “알파고는 전 세계에 있는 바둑 데이터를 다 모아 그것을 바탕으로 로직을 개발해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고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공지능과의 대결은 ‘면벽(面壁) 승부’ 혹은 ‘고수 유령들과의 싸움’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세돌과 대국 당시 알파고는 베타 버전으로 완성이 안 된 상태였으나 그 후 알파고 마스터 버전을 거쳐 알파고 제로가 개발되어 인간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완성품으로 만들어졌다.
“승부사로서의 쾌감과 자존감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바둑이 저에게 주는 기쁨이 사라진 것이죠. 저는 바둑을 예술로 배웠습니다. 둘이서 마주앉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나간 것입니다. 지금은 과연 이게 남아 있는지….”
이 말 속에 이세돌이 은퇴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가 녹아 들어가 있다. 인간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 속의 존재다. 길 속의 존재에게 완성이란 결코 닿을 수 없는, 꿈속에서 어른거리는 미지의 생명체다. 그 생명체가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바둑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둑 안에 무한이라는 신비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은 형태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런 무한을 내장한 알파고는, 기억이 없고 시간이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그 완전한 생명체는 역설적으로 바둑의 내부에서 일렁이는 무한의 물결을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곁가지>
지난 2월 말부터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취재하면서, 제대로 몰랐던 알파고의 능력에 놀랐지만 주목하지 않아온 인간 능력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됐다.
“4개월 전 기보로 보건대 알파고는 나와 상대할 실력이 못 된다.” 2월22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첫 기자간담회에서 이세돌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대국 전날인 3월8일 기자간담회에서 이세돌은 딥마인드 대표인 데미스 하사비스가 알파고의 알고리즘을 설명하는 걸 듣더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세돌은 “알파고가 인간 직관을 어느 정도 모방이 가능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조금 긴장된다”며 “5 대 0은 아닐 것 같다”고 물러섰다. 하사비스가 알파고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하지 않고 유효한 경우의 수만 계산하는 ‘정책망’ 구조라고 설명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이세돌은 컴퓨터가 사람의 바둑을 능가할 수 없는 특성이 인간의 직관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기계가 직관을 모방할 수 있다면 게임의 구조가 달라질 수 있다는 핵심을 알아차린 것이다. 사람이 직관이라고 말하는 것을, 컴퓨터는 심층신경망 구조의 인식 알고리즘으로 변환해서 유사한 기능을 갖도록 만들어낸 셈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계산하지 않고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능력을 통해 알아차린다. 사람은 개와 고양이를 구별할 줄 알고, 남자와 여자의 얼굴도 쉽게 식별한다. 본능적이어서 우리가 어떻게 그런 판단능력을 지니게 됐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컴퓨터에 가르치기 어려운 기능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직관이라고 불러온 기능을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다양한 층의 논리판단 구조(심층신경망)로 해독해,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학 교수의 선구적 연구가 2012년 구글의 고양이 사진 판별 기능으로 진전됐고, 알파고에서 심화됐다. 이런 인공지능이 사람을 모방하기 위해 직관을 재구성하는 구조를 보면 신비롭게 여겨져온 인간 직관의 특성도 윤곽이 드러난다. 그것은 무수한 정보 중 중요한 것만 골라내고 불필요한 나머지를 과감하게 버리는 능력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진정 소중한 것만 찾아 최소한으로 소유하는 게 인간 인식의 특성이고 우리는 그 구조를 직관이라고 본능화했다. 추상적 능력과 창의력도 세부적인 것을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통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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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economy/it/739106.html#csidx944459bd88ff64d94d080913c8d40fb
여동은 기자 deyuh@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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