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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배우 김혜수(50)에게 '내가 죽던 날'은 운명이었다.
김혜수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홍보차 라운드 인터뷰를 개최해 여러 이야기를 털어놨다.
'내가 죽던 날'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김혜수),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이정은)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 각자의 선택을 그린 작품.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으로 채택돼 섬마을에서 보호를 받던 소녀 세진(노정의)이 사라진 이후의 상황을 그린다. 현수가 세진이 사라진 이유를 되짚어보는 탐문수사 형식으로 이뤄져 흥미를 자극하면서 세심한 감정, 인물 표현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무엇보다 세 여성이 끝내 이루는 연대가 깊은 여운을 안긴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를 비롯해 김선영, 문정희, 이상엽, 조한철, 김태훈 등 탄탄한 내공을 가진 배우들이 총출동해 영화의 풍성함을 높인 가운데, 드라마 '시그널'에 이어 다시 형사 캐릭터로 돌아온 김혜수의 변신이 반갑다. 남편의 바람, 사고 등 여러 일들로 벼랑 끝으로 내몰려있던 현수는 세진의 흔적을 추적하던 중 자신과 닮은 모습을 발견, 내면의 큰 변화를 맞이한다. 김혜수는 형사의 집요함부터 무너져 내린 인물의 복잡한 심경까지 리얼하고 섬세하게 표현해내 대체불가의 배우임을 또 한번 증명했다.
김혜수는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묻자 "'국가 부도의 날' 촬영 마치고 나서 봤다. 촬영하는 동안에는 그 작품 말고는 전혀 대본을 안 본다. 끝난 뒤에 잠만 자고 나서 책들을 본다. 그 때 이 시나리오가 제일 위에 있었다. 제목에 확 줌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 영화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나랑 현수와 상황은 다르지만 내 이야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전부터 그냥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보통 신인 감독들이랑 하면 새로워서 활력이 되는 것도 있지만 현장 경험이 없어서 어려움도 있다. 보통 글이 좋으면 감독님의 단편 등의 전작들을 다 본다. 이번에는 그냥 건너뛰었다. 생각도 안 했다. 그만큼 글이 너무 좋았나보다. 촬영 다 하고 나서 깨달았다. 이번엔 뭐에 이끌리듯이 했다"라고 밝히며 이야기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이어 "작품을 하게 될 때는 내 마음이 가는지, 안 가는지가 중요한데 마음이 이번엔 많이 갔다. 저희 영화에 우리들의 마음이 담겨서 참 다행이다. 책으로 봤을 때 너무 좋았다. 등장인물들에 여성들이 많고, 과정이 어둡고 아프고 지난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서 사실 투자가 쉽지는 않았다. 스펙터클한 영상에 열광하는 관객들이 많기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는 용기가 필요한 작품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정말 제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막연하지만 두터운 믿음들이 있었다. 이 영화를 반드시 제대로 해내자는 게 유일한, 최종 목표였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생의 큰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는 현수 캐릭터 묘사를 위해 피폐하고 초췌한 외적인 변화까지 감행한 김혜수다. 이밖에도 직접 작성한 대사를 하이라이트 장면에 사용한 그는 "민정(김선영)과의 오피스텔 씬에서 나온 대사는 제가 직접 썼다. 제가 한 꿈을 1년 이상 지속적으로 꾼 적이 있다. 심리적으로 죽은 상태였다. 꿈에서 제가 죽었는데, 그게 오래 된 느낌이었다. '저걸 좀 치워주지'라는 생각을 매번 하면서 자다 깨다 그랬다. 현수의 심리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기에 이 경험이 맞지 않을까 싶어서 제안했다"라고 밝혔다.
"연기를 할 때 보통 배우의 사적인 경험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이 작품은 모든 인물들의 시작이 상처와 고통의 정점이에요. 그 캐릭터를 마주해야 하는 제가 진짜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어요.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어놓고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예전부터 극중 인물보다 김혜수가 보인다고 해서 그게 큰 숙제였고, 개인이 드러나는 것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배제하려는 게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엔 자유로웠죠. 현수라는 인물에 접근하려면 나의 어두운 면을 감추고 시작하는 게 말이 안 됐고, 심도 있게 나눴어요. 그 씬 찍을 때 선영 씨도 너무 좋았어요. 연기와 진실 사이의 경계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등장을 하든, 하지 않든 정말 제 친구였고, 고마웠어요."
김혜수에게 '내가 죽던 날'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이정은, 김선영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이번 작품이 첫 호흡이나 김혜수는 "좋은 친구를 얻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정은 씨의 나이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분은 정말 저보다 훨씬 더 어른 같다. 사실 연기 잘하면 다 그렇게 보인다"라고 너스레를 떨며 "제게 신기루 같은 분이다. 카메라 앞에서 정직하게 한다는 건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그 분은 해낸다. 제가 배우로서 우러러 보는 분이다. 이번 작품에서 이정은 같은 사람을 알게 된 것, 마음을 얻은 것, 이 인연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또 "김선영이라는 배우를 만난 것도 이에 못지않다. 정말 좋은 배우더라"라며 "인격과 배우로서의 성장이 정비례한 분들이다. 한 작품을 하면서 두 명이나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분들과 인연이 생기지 않았다고 해도, 함께 작업을 하는 시간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영화의 성패와 상관없이 너무 크다. 그걸로 이미 이 영화에서 예상치 못하게 얻은 느낌이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날 김혜수는 여느 때보다 진솔한 면모로 자신이 지닌 상처와 고충을 털어놨다. 지난 2019년 불거졌던 모친의 억대 빚 사건부터 은퇴 고민, 신인 감독들이 가져야할 패기 등까지 거침없이 속내를 끄집어냈다. 그 안에는 연기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자리했다.
"개인적인 일(모친 채무 사건)이 있었죠.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어요. 너무 놀랍고 어떻게 할지 몰랐어요. 현수가 극중 '내 인생이 멀쩡한 줄 알다가 개박살났다. 나는 진짜 몰랐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제가 실제로 한 말이었어요. 당시에 정말 일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일을 시작해서 일어난 일 같았거든요. 영화 '한공주'에서 한공주(천우희)가 '내가 잘못한 게 없어'라는 대사를 해요. 저는 이 마음과 이번 영화의 세진 대사인 '모르는 것도 죄'라는 마음이 공존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민정과 같은 친구의 말을 듣고 '내가 해온 시간을 더럽힌 상태로 마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상태에서 했던 드라마가 '직장의 신'이었고 영화 '관상'이었어요. 결과적으로는 현수처럼 제게도 친구가 있었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일이 제 돌파구가 되어줬어요."
그는 "어릴 때 데뷔하다 보니 제대로 갖춰야 했던 게 많이 비어있었다. 어른들을 동경해서 흉내낼 뿐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지 않나. 저는 몰랐다. '그냥 열심히 했는데 왜 못한다고 그러지?'라고 생각했었다. 저를 배우로서 활용할 수 있는 소스가 너무 단조로웠다. 지금 배우의 길을 선택하는 친구들과 달랐다. 영화 속의 인물이 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까지 알고 있다. 내가 캐릭터를 매개로 카메라 앞에서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느냐가 제게 큰 관건이다. 이 영화가, 현수라는 캐릭터가, 가장 군더더기 없이 그걸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촬영 현장이 무섭다는 김혜수는 은퇴를 고민한 적도 여러 차례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는 "피폐해져가는 걸 느끼기도 한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일하면서 보냈는데 과연 언제까지 이걸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저는 제가 좋은데 연기를 할 때는 제가 싫다. 무언가를 해내야하는 동시에 한계와 직면해야 한다. 그래서 현장이 괴로운 것 같다. 제일 가고 싶지 않은 두려운 공간이다. 항상 한 작품 끝나고 나면 '은퇴해버리자'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관성처럼 연기를 다시 해요. 한 번은 우연히 TV로 '밀양'을 보게 됐어요. 2017년쯤이었어요. 거기에 나오는 배우들이 위대하게 느껴지면서 '연기는 저런 분들이 해야지. 수고했다'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밖에 나가서 찬바람을 맞았어요. 그 전까지는 사실 '왜 나는 이것밖에 못하지?'라는 마음에 괴로웠는데 마음이 싹 정리가 됐어요. 저렇게 훌륭한 배우들이 있다는 것이 눈물이 났고요. 그런데 몇 개월 있다가 '국가 부도의 날'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피가 거꾸로 도는 거예요. 몇 개월 사이에 '그래. 이것까지만 하고 유예 기간을 가져야겠다'라고 치사하게 마음을 먹었죠. 그러다 또 '내가 죽던 날'을 만났어요."
그럼에도 김혜수는 여전히 많은 후배들의 롤모델이자 워너비다. 이에 김혜수는 "솔직히 나쁜 놈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 거다. 저도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저는 모순이 많다. 늘 언행일치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산다. 다만 기분에 좌우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감에 대한 강박이 있는 건 아니다. 이왕이면 좋은 건 나누면 좋지 않겠나. 롤모델 등 누가 저한테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압박을 느끼는 스타일이 아니다. 또 멀리서 바라보면 좋은 걸 크게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감사한 일이지만 책임감이나 부담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냥 마음가는대로 한다. 저도 실수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내가 죽던 날'은 오는 12일 개봉한다.
[사진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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