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영화
[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배우는 혼자만의 힘으로 성공하는 게 아니에요. 같은 작업자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해요. 뒤늦게 제가 이렇게 된 건, 그런 걸 좋게 봐주셔서 아닐까요?"
배우 이정은(50)은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영화 '내가 죽던 날' 홍보차 라운드 인터뷰를 열어 각종 이야기를 털어놨다.
신예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내가 죽던 날'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김혜수),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이정은)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 각자의 선택을 그린 작품. 이정은은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섬마을 주민 순천댁을 연기했다.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겪은 순천댁은 외딴 섬처럼 홀로 지내던 중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인 세진(노정의)이 계속 눈에 밟히고, 실종 사건 이후엔 현수에게 세진의 행적을 알려주는 인물이다. 이정은은 기묘한 분위기로 긴장감을 더하면서 동시에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묵직한 연기를 선보여 '믿고 보는 배우' 수식어를 공고히 했다.
최근 열린 언론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본 이정은은 "저는 (김)혜수 씨랑 (김)선영 씨가 눈에 많이 들어왔다. 제 씬에서는 눈물이 안 났다. 제 씬은 혹독하게 보고 동료 배우들의 연기에 감동을 받았다"라며 "김혜수 씨는 주인공이지만 큰 변화가 없는 인물이다. 한 무드로 흘러갈 수 있는 걸 세세하게 표현해냈다. 그런 연기를 하는 배우가 진짜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이어 "요즘은 속도가 빠르고 직선적인 작품들이 유행을 많이 한다. 다큐를 하나 봤는데 어머니가 아들을 잃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다가 나중에 터뜨린다. 이처럼 절망적인 순간이 올 때 인간의 반응이 어떤 게 솔직한 건지 생각하게 된다. 울고 터뜨리면 좋은 연기라고 평가받지만 삶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 결정이 느린 것에 대해서 굉장히 매력을 느꼈고 어떤 배우들이 하게 될지 궁금했다"며 "압박감에 놓여있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게 쉽지가 않다. 사건을 위주로 보는 게 아니라 사건 뒤의 심리를, 인물의 마음을 보는 게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하며 '내가 죽던 날'의 미덕을 강조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말없이 몸짓과 표정으로만 연기를 하게 된 이정은은 "찍고 있는 동안에는 부담이 됐다"면서도 "저는 이 영화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보통 제가 언어를 살리는 역할을 많이 해오지 않았나. 그러던 중에 어느 날 대사가 되게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배우로서 어떨지 생각이 들었던 찰나에 이 대본이 왔다. 나름대로 재밌는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후시 녹음 작업을 통해 소리를 완성한 그는 "제 음성을 뒤집어서 소리를 내는 게 원활하지는 않다. 제가 소리 전문가도 아니지 않나"라며 "흡연, 과음에 의해서 기관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자료를 많이 봤다. 하지만 이 인물은 목구멍 자체가 말라비틀어진 인물이다. 그 사이에서 나오는 파열음에 대해 생각했다. 겨우겨우, 아슬아슬하게 나오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라고 밝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섬에서 촬영이 주로 진행되다 보니 해프닝도 있었다고. 이정은은 "배가 끊겼는데 이장님이 보트를 태워주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이랑 조금 겹쳤다. 포항에서 서울 근방으로 가서 촬영하고 또 다시 포항으로 오곤 했다. 일정에 쫓겼다. 그 때 마을에 나가는 배가 없었다. 방법이 없었는데 이장님을 깨워서 개인 보트를 타고 겨우 갔다"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무엇보다 이정은은 이번에 첫 호흡을 맞추게 된 김혜수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는 "혜수 씨는 우리에게 스타다.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는 배우인 것 같다. 저랑 같은 또래니까 저 사람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 힘든 지점을 통과한 사람의 얼굴이 있더라. 그래서 현장에서 너무 좋았다. '정말 좋은 배우 얼굴이다'라고도 말했다"며 "너무 광이 나는 사람이다. 제게는 스타라서 제가 아이 같다. 쓰다듬어주는 느낌이다. 동년배이긴 하지만 꿈속의 요정 같은 느낌이다. 지금도 신기하다"라고 전했다.
앞서 김혜수가 인터뷰에서 이정은을 두고 "연기와 인격을 갖춘 진짜 어른"이라고 표현한 것과 관련해서는 손사래를 치더니 "혜수 씨는 껴안고 뺨도 만져주는 스타일이다. 저는 약간 투박해서 지그시 보는 스타일이다. 소리 없이 배려하는 느낌을 받으신 것 같다. 나보다 더 어른인 사람이다. 아마 척박한 연극을 하면서도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걸 유지한다는 면에서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 싶다. 저는 조연출을 하다가 연기를 하게 돼서 현장에서 스태프를 되게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혜수 씨도 그런 것 같다. 그런 게 서로 작업자를 존중하는 게 통했다. 저보다 훨씬 어른이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지금은 이정은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극 무대에 이어 브라운관과 스크린에도 진출하며 대중 인지도를 높인 이정은은 KBS 2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으로 브라운관에서 히트를 쳤고, 무엇보다 아카데미 4관왕, 칸 황금종려상 수상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을 통해 전 세계로 존재감을 떨쳤다. 때로는 먹먹한 눈물을, 때로는 소름끼치는 광기를 안기는 그다.
작품 활동은 물론 광고계에서도 맹활약 중인 이정은은 "'기생충' 이후로 찾아주시는 곳이 많아졌는데 되게 부담스럽다. 실력이 별로 없는데 거품이 많이 껴서 힘들어죽겠다고 말한다. 그래도 좋다. 연기를 좋아하는데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진다는 건 특혜다. 그만큼 책임감이 많이 따르는 것이니까 열심히 해야 한다"며 "송강호 선배님이 자꾸 저보고 '너 돈 많이 벌었겠다'라고 하신다. 문광 이미지로 파생되는 광고들이 엄청 들어왔다. 봉준호 감독님한테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하나 싶다. 어느 기회에 맛있는 걸 사드려야 하는지 고민 중이다. 아직도 조금 거두고 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여전히 "내 얼굴은 귀여운 스타일"이라고 말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이정은은 "저도 옛날에는 좋은 반응이 주로 보였는데 요즘에는 나쁜 것도 눈에 많이 보이더라. 매번 연기를 할 때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상에서 반전을 가지고 있는 역할을 주로 했다. 최근에 '평범한 연기는 잘 못하지 않나'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것도 제가 도전을 해봐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새겨들을 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나간 작품은 지나간 대로 둔다는 이정은은 "이전의 작품들은 옛날 애인 같다. 그냥 새로운 작품에 관심이 많다. 지금 하는 것에 몰두하고, 다음 작품은 다음 작품이다. 이전의 작품들을 추억하고 되짚을 게 아니라 거기서 못 해낸 게 있다면 다음에는 그런 실수 없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넘어간다. 이야기는 계속 새롭게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면 계속 에너지가 생긴다. 사실 제 일상은 그냥 노인의 삶이다. 강아지 산책하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게 전부다. 그런데 이야기 안에서는 생동감이 있으니 환상처럼 느끼는 게 아닐까"라고 전했다.
'기생충' 히트 이후 할리우드로부터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고 솔직히 고백한 이정은은 "논의 중인 작품이 있었는데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멈췄다. 개인적으로 영어 공부를 계속 하고는 있다. 할리우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국 콘텐츠가 더 좋아져서 굳이 나가야 하나 싶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더니 "배우는 혼자만의 힘으로 성공하는 게 아니다. 사람 운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동료애다. 연기를 하면서도 같은 작업자에 대한 존중감이 있어야 한다. 뒤늦게 제가 이렇게 된 건, 그런 걸 좋게 봐주셔서 아닐까 싶다"라고 말해 향후 더욱 활발한 행보에 기대감을 쏠리게 했다.
오는 12일 개봉.
[사진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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