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서른 한 살 생일을 앞둔 소피가 20년 전 아빠와 함께 갔던 튀르키예 여행에서 촬영한 캠코더를 들여다보며 아득한 회상에 젖는다. 서로를 찍은 캠코더 안의 영상들은 흔들리거나 거친 화질, 프레임 바깥으로 피사체가 나가버리고 소리만 들려 오기도 한다. 이런 영상을 닮은 이야기 전개로, 기억의 불분명한 정보와 진실을 미로처럼 어렵게 찾아가는 구조라 영화는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다.
열한 살 딸과 서른한 살 젊은 아빠는 호텔 선베드에 누워 일광욕과 물놀이를 하고, 당구도 치고, 보트를 타고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시내 식당에서 무전취식을 하는 공범자가 되기도 하고, 클럽조명과 한 몸인 듯 광란의 춤도 춘다. 딸의 등에‘애프터썬 크림’을 발라주고, 호신술을 가르쳐 주고, 미래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부녀라기보다는 남매처럼 보인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그들에게 때때로 감지되는 불편한 감정에 신경이 쓰인다.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감하는 것 같지만 듯 전해지지 못하는 사연이 있음을 막연하게 느낄 뿐이다. 소소한 갈등이 생기자 소피는 아빠와 떨어져 또래의 아이와 설레는 첫 키스를 한다. 갤럼은 혼자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에 싸인 듯 무표정이 되었다가 울음을 토해낸다. 춤추는 장면에서 나오던 ‘Under Pressure’라는 곡이 어쩌면 글램이 느꼈을 압박과 절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소피가 캠코더 영상을 보며 어려서 몰랐던 아빠에 대한 많은 것을 추측하며 다시 기억으로 저장하기를 반복한다. 갤럼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갈 때 관객도 기꺼이 동행한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소피도 알 수 없는 관객의 몫으로만 남겨진 비밀스러운 기억의 진실을 찾아야 할 때가 있다.
갤럼은 때때로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있다. 위태롭게 난간에 올라간다거나, 무표정하게 있거나, 혼자 춤을 추다가도 슬픔에 잠긴다. 태극권을 하기도 하고, 바다를 돌아다니다가 호텔 방에서 나체로 웅크려 울기도 한다. 소피와 함께 카펫을 사러 간 가게의 창고 안에서도 흐느낀다. 서른 살 소피의 발아래 깔린 카펫이 그때의 카펫일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여행이 끝나고 공항에서 헤어질 때, 소피가 돌아서 가는 모습을 갤럼이 한참을 찍다가 렌즈 밖으로 소피가 사라진다. 그즈음, 갤럼이 바닷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바닷물이 목까지 잠겨오는 장면을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 본다. 그리고 갤럼이 보내온 엽서에 마지막 인사가 있었다는 걸, 이십 년이 흐른 먼 거리에서 확인하는 아릿함이라니.
“소피, 정말 사랑해. 그건 절대 잊지 마. 아빠가.”
영화는 안개 속에서 헤매듯 갤럼의 복잡한 심경을 짐작하고 유추하게만 한다. 대사에서 간간이 수집한 파편을 모아 그가 처했을 어떤 상황으로 연결지어 볼 뿐. 소피도 그때 아빠의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명확하지는 않다. 다행히 어린 소피와 성인이 된 소피가 제각각 찾아간 과거에서 자신을 사랑한 아빠에 대한 기억은 완성되지만, 왠지 가슴이 저며온다.
소중한 관계를 위해 서로 비껴가야 할 감정도 있다. 하지만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은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마침내, 다시 친밀할 가능성이 영원히 없음을 확인할 때는 기억만으로 상대를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튀르키예 지진 참사를 보며 준비하지 못한 수많은 상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느닷없이 다가온 죽음에서, 예상치 못한 이별 직전에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알고 있었을지. 생존자들은 육체의 아픔이 낫기도 전에 찢어질 듯한 마음의 고통이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텐데…. 상실의 층 안에 있었던 서로에 대한 밀접함의 결여가 끈질기게 파고들고, 최선을 다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마치 형벌과 같은 비통함을 감당해야 할 것인데. 그렇게라도 애타게 그리워하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기억에 아파하며 상처를 마주할 수 있는 자는 좀 나은 위치라 할 수 있을까.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전문위원 겸 수필가.
*이 글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이석희 기자 goodluc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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