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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인은 24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티나 터너의 타계 소식을 전하게 되어 매우 슬프다. 그녀는 음악과 삶에 대한 무한한 열정으로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팬들을 매료시켰으며 미래의 스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애도했다.
이어 “오늘 우리는 그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음악을 우리에게 남기고 떠난 사랑하는 친구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녀의 가족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한다. 티나, 우리는 당신을 무척 그리워할 것이다”라고 했다.
티나 터너는 이날 스위스 취리히 인근 쿠스나흐트 자택에서 오랜 투병 끝에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버라이어티는 “티나 터너는 남편 아이크와 함께 크로스오버 히트곡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를 발표한 지 10여 년이 지난 1984년 캐피톨 레코드 앨범 ‘프라이빗 댄서(Private Dancer)’로 팝의 정점에 올랐다. 세 곡의 팝 히트곡을 탄생시킨 이 컬렉션은 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그래미상을 네 번이나 수상했다”고 전했다.
모두 8번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터너는 199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2005년 케네디 센터 아너스에서 커리어 업적을 인정받았다.
티나 터너의 솔로 작품은 정규 앨범 10장, 라이브 앨범 2장, 사운드트랙 2장 등을 포함하며 그의 음반은 세계적으로 1억장 넘게 팔렸다.
‘전설의 디바’로 불린 티나 터너는 가정폭력과 여러 가지 건강질환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는 20대에 아이크 터너와 그의 밴드 킹스 오브 리듬에서 공연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아이크와 티나는 아들 로니를 낳고 2년 후인 1962년 멕시코에서 결혼했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훌륭해 보였지만, 그녀는 남편의 수년간의 신체적 학대를 견뎌내야 했다.
티나는 2018년 선데이 타임즈와 인터뷰에서 “남편은 내가 그를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폭력이 있었다. 내가 그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적인 학대를 당했다”고 고백했다.
티나는 1978년 아이크와 이혼하면서 학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났다. 이후 수년 동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신부전, 고혈압, 장암 등 여러 가지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다. 2013년 10월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018년엔 장남 레이몬드 크레이그가 LA에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했다. 크레이그의 친아버지는 터너의 밴드 메이트였던 레이몬드 힐이었다.
티나는 캘리포니아 해안가에 유골을 뿌린 후 "엄마로서 가장 슬픈 순간"이라고 말했다. 이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장남은 59살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내 아기가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2019년 티나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아들의 사망 이후) 그냥 계속 나아갔다. 그냥 계속 나아가면서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랐다”고 전했다.
2022년, 티나는 막내 아들 로니가 대장암 합병증으로 사망한 후 또 한 번 큰 슬픔을 겪었다.
당시 티나는 인스타그램에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로니, 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어. 슬픔에 잠겨 눈을 감고 사랑하는 아들, 너를 생각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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