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설] 대학미식축구에서 터진 ‘인생 역전’필드골

극적인 필드골을 넣은 그로스(95번)./게티이미지코리아
극적인 필드골을 넣은 그로스(95번)./게티이미지코리아

5초안에 일어났다. 로또도 잭팟도 아니었다. 공차기 딱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가장 바닥에 있는 선수가 영웅으로 떠올랐다. 워커 온(walk-on)이 장학생 선수가 되었다. 수백만 수천만 달러를 벌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장학금을 준 극장 골

현지시간 11월 26일 미국 시애틀. 7만 관중이 모인 대학 미식축구 워싱턴 대와 워싱턴 주립대 시합. 두 대학은 숙명의 지역 맞수. 21대 21. 남은 시간은 단 5초. 워싱턴 대 키커인 그래디 그로스가 필드 골을 찼다. 42야드를 날아간 공이 골대 사이를 넘는 순간 시계는 0.00. 승부를 결정짓는 극장 골이었다. 24 대 21.

워싱턴 대가 13승 무패를 기록하며 지역 선수권 결정전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관중들이 운동장을 휩쓸며 감독, 선수들과 승리의 기쁨을 터트렸다.

거기까지는 피 말리는 승부 끝에서 볼 수 있는 감격의 장면. 그 보다 더 진한 감동이 일어난 곳은 선수 탈의실이었다. 감독이 “추수감사절 주말이다. 그래디, 고마워”라고 하자 선수들은 함성을 질렀다. 이어 감독은 그래디를 한 복판으로 나오게 한 뒤 감싸 안으며 "그레디가 고마워할 것은 그가 얻게 될 장학금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선수들은 모두 그에게 몰려가 환호했다. 물세례가 쏟아졌다. 그래디는 "선수들이 나를 마구 휘감았어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요“라고 말할 뿐.

미국에서 일대 화제가 된 것은 워싱턴 대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래디의 필드 골 승리가 만든 ‘장학금’이었다.

장학금 주는 것이 그렇게 난리 날 일인가? 선수라면 다 받는 것이 아닌가?

■‘워커 온’ 그래디

미국과 캐나다 대학들의 운동부에는 주전, 후보 다음에 ‘워커 온’이 있다. 장학금 숫자 제한 때문. 워커 온들은 자기 돈으로 학비를 내는 선수다. 팀에서 가장 못하는 선수. 그저 연습용 선수다. 원정 경기에는 함께 가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워커 온들이 팀에 헌신한 공로로 장학금을 받을 때가 있다. 동료들은 물론 대학 전체가 내 일처럼 기뻐한다. 그러나 극히 드물다. 워커 온은 대학 스포츠조차도 얼마나 냉정한 경쟁 터인지 알 수 있는 독특한 제도다.

그래디는 고교 때는 유망주였으나 워커 온이다. 장학금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키커.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역할. 팀에서 위상은 가장 바닥이다.

키커는 선수들이 공을 손으로 들고 뛰면서 경기를 하는 미식축구에서 오로지 발로 공을 차는 것이 임무. 굳이 축구에 비교하자면 페널티 킥을 도맡아 차는 선수와 비슷하다. 그러나 축구는 당장 뛰고 있는 11명 가운데에서 한명이 그 역할을 맡는다. 미식축구의 키커는 아예 운동장에서는 뛰지 않는다. 바깥에서 오로지 필드 골이나 킥 오프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여간해서는 빛나는 선수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키커도 이름을 날리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한국에서 이민 간 구영회 선수는 프로 미식축구(NFL) 애틀랜타 팰컨스 소속. 2022년 3월 팰컨스와 키커로서는 최고 수준인 5년 간 2,425만 달러(330억 원 가량)에 재계약을 맺을 정도로 인정받는다.

대학에서 키커들은 워커 온이 많다. 중요 자원으로 취급되지 않는 탓. 시합에 나가더라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장학금을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워커 온 키커는 서럽고도 서러운 신세.

그래디는 워커 온이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자주 경기에 나선다. 하지만 아무리 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선수 생활을 하지만 내 돈으로 학교를 다니는 그래디는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서러울까?

그래디는 인생 첫 승부 결정 골을 터트렸으나 이전 3경기에서 수초를 남기고 필드골을 다 실패했다. 키커에게 냉정한 NFL 선수라면 벌써 쫓겨났었다.

그러나 감독은 “믿었다. 그래디는 정신력이 강하다. 연습 마다 멋진 킥을 본다. 언젠가 터질 것으로 기대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 장학금을 줄 기회는 바로 이때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가 막힌 시점이었다. 선수권 결정전에 나갈 수 있는 승리의 극장 골을 만든, 다름 아닌 ‘워커 온 키커’의 장학금. 미국이 열광한 이유다.

미식축구 1부 대학들 1년 평균 장학금은 3만6.000 달러 수준. 2년 남은 그래디는 7만 달러 이상을 아낄 수 있다. 큰돈이나 아무 것도 아니다.

드디어 NIL((이름, 사진, 영상 등) 계약이 터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 시애틀의 기업이 그래디에게 광고 계약을 요청한 것. 장학금이 만들 나비효과의 출발. 워커 온 키커에서 영웅이 된 그는 쏟아질 NIL 계약으로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프로로 갈 경우 구영회처럼 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야말로 5초 안에 이뤄진 인생역전.

■NIL의 무서운 힘

1869년 이래 미국의 대학 스포츠는 엄격한 아마추어 운동이었다. 이제 선수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 2021년 6월, 연방대법원은 대학스포츠위원회(NCAA)가 학생들에 대한 교육 관련 지급을 제한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판결했다.

NCAA는 규정을 바꾸었다. 선수들이 자신의 NIL을 팔 수 있는 초상권을 확인했다. 선수들의 시장가치를 인정했다. 선수로서의 명성을 활용해 돈을 벌 수 있도록 한 것.

선수들은 광고에 직접 나가거나 소셜미디어에서 광고를 하고 상품을 팔 수 있다. 자신만의 스포츠 캠프, 사업을 하며 유료 강연을 할 수도 있다.

올 한해 NIL로 가장 돈을 많이 번 선수는 유명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의 아들인 보로니. 590만 달러(80억 원)를 벌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USC) 1학년 농구 선수인 그는 고교 순위 50권의 무난한 실력. 대학에서는 심장병으로 뛰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아버지 명성 덕에 운동화 광고 등으로 청년 갑부가 되었다.

2위는 콜로다도 대 미식축구 쿼터백인 셰더 샌더스. 닭튀김 광고 등으로 480만 달러를 벌었다. 100만 달러 넘게 번 선수가 여자 농구 선수 1명 포함해 10명에 이른다.

선수들이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대학 스포츠는 ‘위험한 야생의 서부’라 불린다. 한탕을 노릴 수 있는 곳. 별 제재도 없는 NIL 때문에 대학 스포츠가 무너질 것이란 걱정이 많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래디 그로스에게는 당장 새 인생이 열렸다. 필드골 하나가 장학금에다 NIL 계약까지 만들었다. 프로 선수가 될 가능성도 높였다. 한 순간에. 이것이 인생이다. 스포츠가 흥미롭지 않은가?

◆손태규 교수는 현재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스포츠, 특히 미국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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