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종합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란 소설이 있다. 그러나 늘 꼴찌를 하는 서울대 운동부에 박수를 보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꼴찌. 아마 서울대 운동선수들일 것이다. 시합 때마다 형편없이 지면서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웃는다. 어릴 때부터 프로처럼 길러져 온 다른 대학 선수들에게 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러 곳에서 ‘머리는 수재, 운동은 꼴찌’라 한다. 당당한 꼴찌, 영광의 꼴찌라 부른다. “수능 1등급, 행정고시 수석 합격자도 ‘운동을 위해 서울대에 입학했다’”며 대견해한다. “어릴 때부터 입시지옥을 헤쳐 온 제일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운동도 하며 시합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수십 년 패배에도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고 한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분위기가 오랫동안 바뀌지 않고 있다. 한국의 체육교육, 나아가 교육 전체가 얼마나 국제 수준에 뒤떨어져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서울대 운동부의 만년 꼴찌는 대한민국 교육의 안타깝고도 슬픈 자화상일 뿐이다. 체육을 무시하거나 그릇되게 키운 교육 탓이다. 서울대 선수들도 그런 교육의 희생양이다. 머리 수재면 운동 수재도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전인교육이요, 올바른 교육이다.
왜 서울대 선수들은 뛰어난 운동 실력을 갖지 못해 다른 대학 선수들의 맞수가 되지 못하는가? 왜 다른 대학 선수들은 공부를 하지 않고 운동만 해 서울대 학생들의 자부심만 높여 주는가?
■ 파리올림픽에서 32개 메달을 딴 아이비리그 선수들
서울대 선수들이 꼴찌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한국 내에서 비교우위를 느끼며 만족하기 때문일 것. 그러나 서울대 궁극의 목표는 세계 일류가 아닌가? 눈을 다른 나라로 돌려보자. 우리의 교육과 대학들과는 너무 다른 현실이 있다.
프린스턴대, 하버드대, 예일대 등 8개 대학으로 이뤄진 미국 ‘아이비리그’는 명문의 상징. 세계 대학 순위에서 서울대보다 100위 이상, 한참 앞선 학교들이다. 그러나 학문만으로 유명하지 않다. 운동도 명문. 공부만큼 운동도 중요하게 여긴다.
파리올림픽에 109명의 아이비리그 재학·졸업생들이 출전했다. 하버드대 26명, 프린스턴대 25명 등. 이들은 여자 1600m 계주 등에서 16개 금메달을 포함해 모두 32개 메달을 땄다. 아이비리그 선수들은 역대 올림픽에서 500여 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식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버드대는 42개, 프린스턴대 38개, 예일대 35개의 다양한 종목의 운동부를 운영한다. 프린스턴대는 전체 학생 18%가 운동부다. 거저 동아리들이 아니다. 전부 미국대학스포츠위원회(NCAA) 2부, 3부가 아닌 1부 대학들과 경쟁한다. 서울대 같은 참패는 없다. 프린스턴대 여자농구는 지난해 1부 356개 대학 가운데 25위에 두 번 오른 ‘강호’. 올해 예상 순위도 41위. 결코 꼴찌가 아니다.
그러나 아이비리그엔 ‘운동 장학금’이 없다. 공부도 잘하는 운동선수들이 4년 간 5억 원이 넘는 학비를 부담하면서 아이비리그로 간다. 다른 운동 명문대의 장학금 제의를 마다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쉽게 입학, 졸업할 수 없다. 여느 학생들과 학업 경쟁을 하면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정도의 높은 운동 경쟁력도 가진다.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의 사라 휴즈는 예일대를 나와 펜실베이니아 법대를 졸업했다. 체조 올림픽 은메달.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4개의 알리시아 사크라몬은 브라운대 출신.
그러면서 아이비리그는 최정상급 프로선수들도 숱하게 배출했다. 100명 넘게 NBA에 뽑혔다. 하버드대에서만 61명이 메이저 리그 팀들에 선발되었다.
‘근위축성 측색경화증’이란 희귀병 유래로 알려진 ‘루 게릭.’ 뉴욕 양키스 1루수로 7년 연속 메이저 리그 올스타에 선정됐다. 메이저리그 최초 영구결번. 컬럼비아대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샌디 쿠펙스는 '신의 왼팔'로 불린 투수.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 컬럼비아대를 다녔다. 선수로 뛰는 동안 야간 강의를 들으며 건축학 전공. 브래드 아스머스는 로스엔젤리스 에인절스 감독을 지낸 뒤 현재 양키스 포수 코치. 다트머스대를 나왔다. 고교 졸업 때 양키스에 지명되었으나 입단을 거부하고 대학에 갔다.
빌 브래들리 전 민주당 상원의원·대통령 후보는 프로농구 선수출신이다. 올림픽 금메달까지 딴 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5개 대학의 장학금 제의를 마다하고 프린스턴대에 입학했다. 4학년 때 프린스턴대를 전미선수권대회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졸업 때는 전국 최우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로즈장학금’을 받고 영국 옥스퍼드대에 유학했다. 어릴 때부터의 전인교육이 미국을 뒤 흔드는 인재를 만드는 모범 사례로 꼽힌다.
하버드출신의 제레미 린은 NBA 우승을 한 최초의 아시아 선수. 대학지원 표준화 시험 2140점으로 화제가 되었다. 라이언 피츠패트릭은 미식축구(NFL) 9개 구단에서 쿼터백으로 선발 출전, 리그 기록을 세웠다.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전공.
■ 운동도 잘하는 ‘공부벌레들’을 보고 배우자
아이비리그와 비슷한 학문 수준을 자랑하면서 훨씬 뛰어난 스포츠 명문은 스탠포드대와 듀크대 등 사립대, 노스캐롤라이나(채플힐)대와 미시간대·UCLA·UC버클리등 공립대들이다. 스탠포드대는 파리에서 금메달 12개 등 39개 메달을 땄다. 한국선수단 전체 32개보다 많다.
이들 대학교는 우수선수를 뽑기 위해 장학금을 준다. 그러나 학업과 운동을 균형 있게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학사 관리를 한다.
17세 자넷 에반스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꽃이었다. 수영 세계신기록 1개, 금메달 3개를 이뤘다. 고교 평점 4.0으로 스탠포드대에 갔다. 일주일에 35시간을 운동하면서 세계신기록 3개를 세웠다. 그러고도 학점 4.0의 높은 성적.
그러나 에반스는 2학년 뒤 자퇴했다. 2년 남은 대학 선수 자격도 포기했다. 학업을 위해 일주일에 20시간만 연습하도록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위해서는 공부·훈련 모두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를 더 딴 뒤 서든캘리포니아대(USC)로 진학해 졸업했다.
미아 햄은 ‘여자 펠레’로 불리는 세계 여자축구 사상 최고의 선수. 올림픽 금메달 2개에 월드컵도 우승했다. 햄도 노스캐롤라이나대를 5년 만에 졸업했다. 베이징 올림픽 훈련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없어 1년을 휴학했기 때문이다.
올림픽 금메달, 월드컵 우승이 아무리 값져도 학교 교육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올림픽 메달이 인생살이 만사형통의 보증수표가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대학에 갈 수 없다.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다.
미국 명문대들이 운동부를 육성하는 이유는 스포츠 참여는 끈끈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지도력을 키우며, 협동심·인내와 같은 중요한 가치를 기를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기 때문. 대학들의 스포츠 중시는 전체 교육의 본보기며 길잡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레 학생들이나 부모들의 머릿속에 정립이 되는 것이다.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들을 키워내지 못한 교육은 정상이 아니다. 학교 교육에서 체육을 천대하고, 어릴 때부터 선수들을 운동기계로 키워내는 풍토가 없어져야 한다. “공부와 운동을 함께 하라” 하면 “연습은 언제하나. 학교 체육 망치는 길”이라는 체육관계자들은 미국 학교 체육을 바로 알고 배워야 한다. 어릴 때부터 운동도 열심히 한 ‘세계 최고 공부벌레’들이 올림픽 금메달을 무더기로 따고 최고의 프로선수가 되는 것을 봐야 한다.
서울대 자랑스러운 꼴찌들도 잘못된 교육체계 희생자다. 그들이 패배를 부끄러워하고, 그 부끄러움을 다른 대학들과 교육당국 등 전 사회가 함께 반성할 때 한국 체육과 교육이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손태규 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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