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2011.02.08.화요일
파토
그렇게 기타를 쥔 우원은 코드도 모르는 채 이글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의 곡을 카피하기 시작했다. 지금 들으면 엉망진창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런대로 잘 치는 줄 알았고, 역시 우원이나 비슷한 수준의 귀를 갖고 있던 친구들도 그런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기타에 빠져 즐겁게 허우적대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우원은 게리 무어를 알게 되었다.
당시 게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헤비 록 연주자였다. 잉베이 맘스틴이 울나라에 제대로 알려지기 직전, 그는 과거 지미 페이지나 리치 블랙모어 등과는 차별화되는 헤비하고 직선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이른바 ‘속주’ 기타리스트였다. 아래 84년의 라이브 클립처럼 말이다(그 이전에는 퓨전 밴드에도 참여했었지만).
특히 1분 30초 경부터의 무반주 솔로를 보면 지금과 얼마나 달랐는지 알만 할 거다.
아직 70년대 록의 잔재가 완전히 걷히지 않았던 그 시절, 강력한 오른손 피킹과 시원시원한 톤을 무기로 한 그의 속주 연주는 변방의 우원 등은 물론 국제 기타계에도 큰 충격이었다.
게리무어 속주의 특징은 테크닉적으로 아주 어렵지 않으면서도 빠른 연주의 분위기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특히 연조도 경력도 실력도 부족한 우리 어린 기타리스트들에게는 크게 어필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의 엄청난 피킹과 농밀한 표현력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이런 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곡, ‘Dirty Fingers’다. 오디오 온리.
이 곡에서 보듯, 잉베이 등 네오 클래시컬 기타리스트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게리는 디스토션 기타를 사용한 클래식 스타일의 연주애 접근하기도 했었다. 이런 곡들이 당시 우리 기타 키즈들에게 끼친 임팩트는 대단한 것이었다.
게리에 빠진 우원은 그의 캐치 프레이즈라고 할 테크닉들을 카피하기 시작했고, 위의 ‘End of the World’ 같은 곡의 오프닝 솔로는 엉성하게나마 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게리무어 연주법에 대한 글을 써서 당시 국내 록 키드들의 성서이던 잡지 ‘월갑팝송’에 보냈는데, 놀랍게도 이 글을 실어줬던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86년이었으니 우원의 매체 기고 역사는 여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지도…
그러나 얼마 후 잉베이와 토니 매컬파인, 비니 무어, 스티브 바이 등 초기교파 연주자들이 등장하면서 속주 지존으로 게리의 위세는 조금씩 빛이 바래 갔다. 허나 우리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강렬한 파워가, 그리고 속주 외에 이국적이면서도 블루지란 발라드의 풍부한 감성이 또한 게리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던 게리의 곡은 위의 속주 연주들이라기 보다는 씬 리지(Thin Lizzy) 시절에 발표한 ‘Parisienne Walkways’ 였다. 이 곡은 유튜브에 신구의 여러 버전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당시 우리가 빽판으로 늘상 들었던 라이브 버전은 바로 아래의 것이었다.
이 버전의 특징은 다른 버전들과 달리 노래 파트가 없다는 것과, 연주가 매우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도입부에 게리의 또 다른 연주곡인 ‘Sunset’ 앞 부분이 전주곡처럼 붙어 있다는 것이다. 역시 오디오 온리.
이 곡은 파리의 산책길이라는 제목에서처럼 프랑스, 혹은 유럽 풍의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아름답고 애수에 차 있으면서도 감정 표현이 뛰어난, 록 기타의 명곡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기타 키즈들이 특히 흉내 내고자 했던 부분은 3분 18초 부분의 볼륨 주법, 그리고 3분 52초경부터 10초나 계속되는 엄청난 피드백 파트였다. 이 부분의 특징은 지저분해지기 쉬운 피드백의 사운드 특성에 반해 열라 깔끔하고도 감성적인 톤이 빚어져 나왔다는 점이다. 이 곡의 다른 버전들에서도 이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소리가 만들어진 적은 없다.
물론 우리들 중 누구도 이 톤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실력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섬세한 피드백 톤의 필수 요소라고 할 좋은 기타와 대음량의 고급 앰프 등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5만원짜리 기타에 10만원짜리 앰프로 공연하던 시절이니.
암튼 그렇게, 게리는 어린 우리에게 속주와 파워, 감성(당시에는 ‘필링’이라고 부르던)을 고루 겸비한 기타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가 울나라를 포함,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90년 그가 블루스로 전향하고 난 후다. 많은 사람들이 ‘Still Got the Blues’를 들었고, 이 곡은 울나라에서 조차 카페와 레스토랑 배경 음악의 단골 메뉴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옛 게리의 팬이었던 우리는 대부분 그 지점에서 등을 돌렸다. 왜였을까.
일단은 당시 헤비 록의 인기가 식어가려던 시점에서 게리의 그런 전향이 찬물을 끼얹는 면이 없지 않았고, 그의 강렬한 연주를 사랑하던 우리는 이 점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Still Got the Blues’라는 이름까지 달고 나온 그의 음악이 그닥 블루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80년대의 헤비 록 팬들은 대부분 프로그레시브 록과 블루스의 팬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블루스는 비비 킹이나 로빈 트라워, 마이크 브룸필드, 제프 벡 같은 연주다. 한편 게리가 블루스라고 들고 나온 곡은 ‘난 아직 블루스를 갖고 있어’ 라는 제목과는 전혀 다른 팝록 기타 연주였다.
이 곡의 초반의 코드 진행은 Parisienne Walkways 나 거의 다를 것이 없고, 사실 멜로디 역시 그 곡을 다시 조합한 형태다. 물론 그런 이유로 곡 자체가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알만한 사람인 그가 대중적인 팝록 곡을 선보이면서 ‘블루스’란 이름을 내세웠다는 점과, 이 점을 포인트로 대대적인 마케팅을 했다는 점, 그리하여 울나라에서도 유명해질 정도로 대중적인 아티스트가 되었다는 사실.
요컨대 블루스를 도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블루스를 빙자한 상업화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의 전향은 우원에게는 변절이었던 것이다.
섭섭했고, 우원은 그를 떠났다.
…그가 어제 죽었다.
시신은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내던 호텔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추측컨대 심장마비던가 약물, 알코올 등이 개입되지 않았나 싶다. 겨우 58세. 중고등학교때는 까마득한 어른이었던 그는 사실 우원과 불과 십 몇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어려서 그토록 심각하게 느껴졌던 게리의 변절이라는 것, 따지고 보면 사소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기타를 놓았거나 댄스뮤직 작곡가나 정치가로 변신한 것도 아니고, 과거에도 간간히 하던 스타일의 연주를 전면에 내세웠을 뿐이었다. 블루스라는 이름을 들고 나온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이후 비비 킹 같은 전설적인 블루스 연주자들도 기꺼이 그와 무대에 섰다. 우원의 블루스에 대한 사랑과 안목은 비비 킹을 능가하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거다.
그럼 우원은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했던 걸까…?
게리는 소년시절 내 영웅이었다. 어려서, 젊어서 사랑하고 추앙했던 인물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 나를 둘러싼 세상도 그렇게 변해가는 듯한 허무와 배신감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마도 게리의 변한 모습은 내가 붙잡지 못한 어린 시절 가치들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스틸 갓 더 블루스를 듣기 싫어 내한공연에도 안 갈 정도로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으니.
하지만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났다. 어려서, 젊어서 사랑하고 추앙했던 인물의 ‘죽음’을 접하면 이젠 변하는 세상에 대한 배신감 보다는 내 청춘이 끝났다는 것, 내 삶도 그만큼 사라져 버렸다는 서글픔에 빠지게 된다. 사라짐은 변함의 극단적인 모습이기에. 변하더라도 아직 존재하는 것에는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그래서 이제, 변절에 대한 섭섭함은 그만 접어야 할 때인 것 같다.
같이 듣자. 스틸 갓더 블루스.
잘 가시오, 게리.
[사진 = 게리무어 공식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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