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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주, 서울경제TV 작가]
기자에게 원고 청탁을 받았다.
'에세이'를 써 달란다. 에세이..... 우리나라 말로는 수필.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이다. 여고 시절 도서관에서 짝사랑하는 교회오빠를 떠 올리며 쓰던 일기 이 후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장르다.
기자는 내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아가는 얘기, 일상을 이야기 하면 된다며,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말발로 날 꼬인다. 오랜 시간 계속된 그의 꼬임에 결국 정신 줄을 놓게 되는 나.... 습자지 같은 나의 필력을 간과한 채, 청탁을 승낙하고 말았다. 기자와 통화를 끝낸 후, 순간의 선택이 후회로 밀려오는데 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한 자도 쓰지 못한 채 흘러 보낸 시간이 5일. 원고 마감 하루 전까지 멍~ 때리고 있는 나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감이 오질 않았다.
내 얘기? 그야말로 신변잡기적인 일상을 되새김질 해 본다. '내가 사는 이야기'..... 참으로 '꺼리' 없는 소소한 일상이로소이다.
원고 마감 하루 전. 난 여전히 한 글자도 쓰지 못 한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이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신접살림을 차린 대학 동창 K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Hi~ 뭐해?
- 그냥 있어.
- 좋은 소식 없어?
- 없어.
서른세살, 미혼 여성에게 기대하는 좋은 소식! 설명 안 해도 감 잡으시길.
- 나 6월에 한국 가. 와이프랑
- 왜?
- 출산하러.
- 와~ 좋겠다.
- 응, 좋아. 너도 빨리 가.
- 알았어.....
K군과의 짧은 통화를 끝낸 후 난 자연스레 좀 전의 통화를 떠올려 본다. 그는 내게 한국에서도 자주 듣는 단골 레퍼토리, '좋은 소식'이란 질문을 해 줬다. 더불어 어린(내게 20대는 모두 어려 보이므로) 아내의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 졌음을 전해줬다.
K군과 그의 피앙세. 작년 여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그들 부부의 모습은 샌프란시스코의
햇살만큼이나 눈이 부셨다. 동화 속에서 튀어 나온 듯한 닮은 꼴 부부는 도시의 풍경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모든 것이 안정된 듯 평화로워 보이는 두 사람. 부부는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한동안 내 눈 앞에 어른거렸다.
K군과의 통화를 끝낸 후, 드디어 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요즘 나의 관심사.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건 바로, 그 누가 아무리 '환상'이라고 우겨도 내겐 결코 깨고 싶지 않은 '꿈' 결혼에 관한 로망이다.
난 왜 이런 환상을 꿈꾸게 된 걸까? 지금부터 결혼에 관한 나의 갈증을 더욱 애타게 만드는 (한 마디로 염장 지르는) 세 부부의 사례를 들어 그 이유를 알려 드리겠다.
Case1. 샌프란시스코의 연인~ 안정된 남편 K.
첫번째는 부부는 앞서 이야기 했던 샌프란시스코의 연인이다. 양가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K군과 L양은 짧은 연애기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의 이상형에 매우 근접했던 것은 물론, 미국 유학 생활의 경험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여러 공통분모를 공유하며, 자석에 끌리 듯 운명 같은 결혼에 골인하게 됐다. 미국에서 치과 의사로 일하는 K군과 그가 이룬 안락함속에 2세를 임신하게 된 20대의 어리고 예쁜 아내..... 집, 병원, 교회가 전부인 남편 K군의 무한 애정과 그의 사랑을 먹고 사는 아내의 안정감. 내게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의 동화 같은 풍경과 동화되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인 것이다.
Case2. 학구열 화끈 커플~ 학비대주는 남편 H.
두번째 커플은 방송국 프로듀서인 남편 H군과 뮤지컬 배우인 아내 H양(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이니셜도 닮았다). 결혼 2년차의 부부는 얼마 전, 전세 대란 속에 이사할 집의 위치 문제로 티격태격 하는 모습이었다.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 바쁜 남편을 대신(?)해 H양과 함께 집을 알아보러 다닌 난, 전화로 중간 점검을 하는 남편과 의견을 조율하는 아내의 사랑싸움에 틈틈이 먼~ 산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드디어 오랜 탐색 끝에 이사 갈 집을 결정한 두 사람. 부부가 선택한 집의 위치는, 얼마 전 성악과로 편입한 아내의 학교 근처였다. 연기를 전공한 H양은 결혼 후 성악과로 편입. 이번학기부터 학업을 시작하게 됐다. 때문에 등교에 용이한 집으로 이사를 결정했다는 것. 덕분에 남편은 차가 있다는 핸디캡(?)으로 출근 시간을 1시간 더 연장하는 희생을 감수하게 됐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의 로망에 불을 지핀 사실은 편입한 아내의 대학 학비는 물론 대학원 학비까지 약속했다는 H군의 외조! H양은 맞벌이의 부담은 고사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할 수 있는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이 시대의 모든 아내가 원하는 이상향이 아닐까.....(단, 환상은 여기까지! 대학원 졸업 후 아내는 남편의 학업을 내조하기로 했단다)
Case3. 아직도 연애 중~ 해장국 끓여주는 남편 Y.
이번에는 8년 열애 끝에 웨딩마치를 올린 동갑내기 부부다. 첫 사랑과 결혼에 골인 한 두 사람은 동거하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며, 본인들은 평생 '권태기'를 느끼지 않을 것 같다고 틈 날 때 마다 자랑질(?)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8년간의 애정행각을 곁에서 지켜본 증인으로서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들은 '닭살 부부의 지존' '금슬 좋은 부부'의 표본으로 인정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일례로 얼마 전 친구들과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난 아내 K양. 그녀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그제서야 여행을 떠난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한참을 놀다가 밤 10시 쯤 돼, 남편에게 보고 싶다며 전화를 걸었는데 몇 시간이 지났을까.... Y군은 해맑은 표정으로 여행지에 도착! 숙소의 문을 열었고, 모두의 부러움 속에 남편은 아내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그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피곤함도 잊을 채 (혹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한 걸음에 달려온 것 이다. 다음날 K양의 친구들이 여행의 피로와 함께 서울 행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같은 시각, 그녀는 집에서 Y군이 끓여준 해장국으로 속풀이를 했다고 한다.
사실 이들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이 꼭 완벽한 이상향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나의 시각일 뿐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 할 수도 있고, 혹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커플들 역시 보이지 않는 나름의 불협화음이 있을 것이고, 여느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부부싸움'을 하거나 '바가지'를 긁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이들 부부들의 모습이, 한국 사회의 정형화된 그것과는 조금 진화된 이미지로 보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들처럼만 살아간다면 '결혼'이라는 건 분명 안 하는 것 보단 하는 편이 훨씬 더 이상적일 것만 같다(실제로 이들 커플들은 이구동성으로 결혼하기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한다).
결혼에 관한 이상과 이성의 갭! 그 차이가 얼마나 큰 지는 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미혼인 지금, 이성보단 이상에 마음을 두고 실컷 그 눈부신 미래를 '꿈'꿔 보면 어떨까? 전문직 종사자, 학비 지원, 해장국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부부들이 누리는 울타리 속의 안락함과 하얀 도화지를 채우는 파스텔 빛 행복을 미리 미리 그려보면 어떻겠냐는 말이다.
웨딩마치의 계절 봄. 이번 주말에는 나의 마지막 남은 싱글 친구가 유부녀가 된다.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난, 나의 하객 전용 정장을 세탁소에 맡겼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결혼식에 함께 갈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 응. 우주야.
- 이번 주 결혼식에 갈 거지?
- 응. 너도 가지?
- 가야지.
- 근데 넌 언제 갈 거야?
- 나? 나도 곧 갈 거야.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경건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릴 거야. 그리고 모두가 부러워 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거야.
어느새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구름 위를 둥둥 날아다니는 나.
잠시 또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이때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친구의 짧고 굵은 한마디!
- 아니, 결혼식. 몇 시에 갈 거냐고?!!!
<이우주 작가 sarangwj@naver.com>
[사진 =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
강지훈 기자 jhoon@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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