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배선영 기자] 배우 박해일에게 영화 '은교'는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의 배우가 70대 노인을 연기하다니. 말로 들었을 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영화 스틸컷 등을 통해 관객들은 이미 노인으로 완벽하게 분장한 박해일의 모습을 보았겠지만, 삶을 굽이굽이 돌아 마지막 정거장을 앞에 두고 있는 노인의 거대한 삶을 표현해야했던 이 젊은 배우는 분장 이상의 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정지우 감독으로부터 캐스팅 제안을 받은 박해일은 '은교' 시나리오보다 박범신 작가의 원작 소설을 먼저 접했다.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이적요에게서 처음 받았던 인상은 그에게 사실 부담이었다. '어떻게 해야할까'가 책을 읽는 그의 머릿 속을 지배했었다. 그리고 박해일은 이제 결과물을 내놓았다. 관객의 평가를 직면해야할 때가 왔다. 누구나 그러하듯, 부담 반 설렘 반, 그리고 허전한 마음 반 후련한 마음 반일 것이다.
20일 오후 삼청동 한 카페에서 박해일을 만났다. 삭발했던 머리는 어느 새 학생들의 까까머리만큼 자라있었고, 영화 속 이적요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말쑥한 청년이 돼있었지만, 눈빛은 더 깊어졌고 촉촉해졌다. 적요(寂寥)의 인생을 살아온 그는 또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 노시인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나요?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억압돼있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만.
캐스팅 제의를 받고, 시나리오보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게 됐었죠. 아무래도 독자로서 객관적으로 읽는 느낌보다는 음..(조용히 웃으며) 노시인 캐릭터라는 제안을 받고 감안하면서 읽을 때의 기분은 사뭇 다르잖아요. 긴장을 많이 하면서 봤던 기억이 있네요. 원작 캐릭터들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만들어질까가 가장 궁금했어요.
- 70대 노인 역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을까요?
거부감보다는 부담이 가장 첫번째였죠. 갈등, 음.. 개인적인 갈등이 있었고 확실히 무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그런 부분에 있어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했고 어느 정도 해볼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과 도전의식이 생기면서 결정하게 됐어요. 굳이 30대 배우를 기용한 것은 연출의 의도라고 보이는데, 감독님은 실제 그 나이대에 배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셨대요. 잠깐 나오는 장면이지만 상상 장면에 나오는 청년의 모습과 노시인의 현재 모습을 같은 배우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이야기 하셨죠.
- 분장은 매번 고역이었을 것 같아요. 8시간이 걸렸다는데 그렇게 분장하고 몇시간을 촬영했었나요?
고생이라면 고생이지만 다 까먹어서요. 시간이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네요. 제 청춘도 금방 지나가겠죠(웃음). 촬영은 낮 촬영과 저녁 촬영을 거의 병행해서 했고, 24시간을 촬영에 온통 썼어요. 그렇게 하고 하루 정도는 피부 트러블 등을 고려해서 쉬었죠. 촬영이 격일로 진행됐어요.
그렇죠. 늙음, 이번 계기로 사실 평소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은 사실이죠. 씁쓸하죠. 늙는 다는 것은 씁쓸해요. 물론 연륜도 생기고 살아가는 시선도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런 긍정적인 부분보다 아쉬운 건 아쉬운거죠. 그래도 이번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봐 주신다면 감독님과 김무열씨 김고은씨 모든 스태프들이 정말 나름 고생해서 찍은 영화를 그렇게 봐주신다면 만족할 부분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어요. 진심으로.
- 단순히 분장 뿐만 아니라 준비해야할 것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목소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아닌 지금 박해일씨의 목소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의도적이었던 건가요?
의도라면 의도인 것인데요. 물리적인 육성을 어떤 기계적 도움도 받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혼자 해내야됐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얼마전까지. 거기서 어색함이 나타난다라면 제 능력밖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인데 그래도 저다운 톤으로 갔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계속 했었고 그 나이대를 너무 짐작을 하거나 예상을 해서 가장 정확한 노인의 목소리다라고 만들어갔다라면 분명 얻어가는 것도 있겠지만 감정적으로 깎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생각했어요. 저 자신에게 가장 유연한 것을 가져갈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본 것 같아요.
- 69세 노인과 17세 소녀의 사랑이라면 사랑일 관계가 변태적으로 보이진 않았어요. 은교와의 상상신은 물론 그랬고요. 물론 그 에로틱한 관계가 영화에서는 많이 삭제돼긴 했지만. 어찌보면 은교와 이적요의 관계는 손녀딸과 할아버지 같았고, 또 어떨 때는 연인 같았어요. 아주 순수한 연인. 연기할 때 주안점을 둔 부분은요?
보통 그 젊은이 대 젊은이의 사랑이라 하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느낌과 대할 수 있느 서로의 기운들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러나 아무래도 그 정도 나이격차가 있는 관계라면 어떤 분위기에 어떤 관계 혹은 어떤 감정의 상태일지언정, 시각은 정말 다를 것 같았어요. '그게 뭘까'라는 것을 계속 염두해두면서 갔었고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찍어나갔던 것 같아요. 한가지 이상인 것 같지만, 결국 한가지로 이야기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둘 사이의 즐거운 분위기일지라도 보이지않는 젊음에 대한 어떤 부러움일 수 있고, 반대로 내가 느끼는 물리적인 나이대의 아쉬움일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런 생각들을 같이 가져가면서 현재 상황 자체를 즐겨보려고 했었죠. 제 나름대로.
- 제자에 대한 일종의 능멸이라고 할까요. 재능이 없는 멍청한 제자였는데 어느 순간 내 것을 다 앗아간 자에 대한 분노도 표현하셔야 했죠.
저 역시도 이적요의 분노가 동의됐어요. 동의할 수 있는 부분에서 연기를 해나가고 그런 애증은 애착이 많이 가기도 했고요. 장면들 장면들이 다 애틋했어요. 정지우 감독님은 세 인물의 관계를 굉장히 디테일하고 또 감정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깊이있게 담아내려고 했었죠. 원작의 서지우 캐릭터와 영화 속 캐릭터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영화에서 더 흥미롭게 드러나있다고 생각해요.
- 흥미로운 장면은 적요와 서지우의 러브샷이죠.
감독님이 촬영 전 굉장히 고심을 하고 촬영 준비할 당시 거닐면서 생각을 많아 하세요. 그럴 때마다 매번 궁금해지죠. 어떤 상황을 만들어주실까 하고.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상차림을 차리라고 했고 촬영에 들어가니 그렇게(러브샷) 마셨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툭 던지셨어요. 막상 찍을 때는 이게 맞는건가 했는데 결과를 보고는 둘의 관계를 보여주기 굉장히 좋은 장면이었다 봐요. 원작에서는 방대하게 표현된 둘의 관계를 영화에서는 단 한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 영화적 매력이 아닌가 싶네요.
감독님의 오케이에 집착해요. 매번(웃음). 그 과정에 집착하는 거죠.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개인적으로는.
- 초반 노출신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네요. 물론 인식하기도 전에 확 지나간 느낌이지만(웃음). 그래도 참 아픈 장면이었어요. 충격적이기도 했고요. 대역이었겠죠. 당연히.
제가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특수분장으로는 쉽지가 않았던 부분이었으니까요. 노시인 이적요를 최대한 노시인 답게 도와줄 수 있는 대역배우분들이 계셨어요. 특수분장으로 커버할 수 없는 부분을 도움을 받은 거죠. 감독님께서 '은교' 오디션 역을 뽑는데도 고심을 많이 하셨지만 저라는 자연인이 가진 사이즈와 이적요스러움의 나이대에 어울리는 부분 부분 모습들도 많이 고려하시면서 극소수의 배우분들을 캐스팅 하셔서 영화에서 찍은 장면들이 몇개 있어요.
-그 장면이 특히나 아팠던 것은 보통은 '내가 늙는다'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데 '내 몸이 늙는다'라는 생각을 들게끔 했기 때문이었죠. 나도 늙어서 저렇게 하고 있겠구나 싶어서 충격적이기도 했고요.
화장실이나 화장대에는 다 거울이 있잖아요. 부끄럽지 않은 공간에서 혼자 있을 때 샤워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때 어린 아이들까지도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 놀랍지 않은 일상에서 출발한 게 맞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도 중요한 것도 아니고 본능일 수 있겠죠. 그 부분이 저도 인상적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야기 전체와 맞닿아있는 장면이고 인물의 감정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부분이라 감독님이 찍으신 것이 아닌가 싶어요.
- 늙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땠을까요?
특수분장 팀이 만들어준 이적요의 얼굴을 되게 좋아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정도면 괜찮게 늙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있다고 생각했었고. 그런데 특수분장 탓인지 아니면 내가 나이가 그 정도 들었다 그 정도 연기를 해야한다 그 나이대 입장이다라고 생각해서 느낀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인지 템포가 느려지는 것 같고 느린 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기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반대로 느리기 때문에 여러사람 불편함을 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박해일은 이날 인터뷰 말미 늙어가는 것에 대한 서글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내가 가장 감정을 못 다스릴 상황은 아무래도 이런 경우겠죠. 살아있는 청춘이라하면 보통은 20대를 이야기하잖아요. 저는 30대고요. 20대에서 발산되는 에너지나 기운들이 너무 부럽죠. 그러나 아직은 크게 차이가 안 난다고 생각을 하죠. 하지만 어느 순간 느껴지는, 그들에게 못 다가가겠거나 같이 어우러지지 못할 때의 작은 순간을 발견하게 되죠. 머뭇거리게 되고요. 그건 세대차이라는 말로도 설명되겠지만 더 다른 이야기로 하자면 내가 나이를 먹었다라는 것일 수도 있고요. 바로 그 순간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황들이 생기는데 기분이 안 좋게 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고 봐요. 거기서 드는 감정들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콘트롤 해야할까 생각하게 되는 시간들이 분명 많아질 것 같아요. 그것이 결국 나이들어간다는 것인 듯 해요."
30대 중반의 박해일은 지금까지 대표적인 동안배우였다. 지금도 그의 맑고 순수해보이는 눈을 보고 있으면, 그가 20대의 누군가를 연기한다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분위기만큼은 이적요가 되기 전과 후가 많이 달라졌다. 그를 통해 이적요를 만나게 된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더욱 깊어지고 슬퍼진 박해일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은교'는 오는 26일 개봉된다.
[배우 박해일. 사진=한혁승 기자 hanfoto@mydaily.co.kr]
배선영 기자 sypova@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