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PC게임에 무관심한 소비자와 기업 "일본 정서와 맞지 않아"
미국 게임 개발기업 블리자드가 출시한 신작 게임 '디아블로3' 때문에 한국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공식 발매 전에 있던 한정판 판매에 수천 명이 밤을 새워 기다리고 출시 직후에는 접속자 폭주로 서버가 마비되는 등 디아블로 열풍이 세차게 불고 있다.
디아블로3 발매에 흥분하고 있는 곳은 한국뿐이 아니다. 전작인 '디아블로'와 '디아블로2'가 전 세계적으로 2천만 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량를 기록한 사실에 비춰보면 이번 신작의 출시 소식이 얼마나 전 세계의 게이머를 흥분시킬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12년 만에 출시된 디아블로3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게이머에게는 카니발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 게이머들의 잔치 분위기 속에 일본만이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
디아블로 관련 기사가 각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주요 매체는 물론이고, 가십 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터넷 매체에서조차 디아블로3의 발매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극소수 게임매거진에서 짤막하게 디아블로3 출시소식을 다룰 뿐이다.
PC보다는 가정용 콘솔게임 중심으로 확대, 발전한 일본 게임 시장에서 PC게임이 이슈화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같은 초대작을 앞에 두고 너무 조용하다니, 이웃나라 한국과는 너무도 큰 온도차다. 일본의 거대한 게임시장 내에서 PC게임의 위상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디아블로3는 한국어를 비롯해 모두 11개 언어로 동시 발매됐지만, 일본어 버전으로는 발매되지 않았다.
최근, 일본 게임업체들은 큰 폭의 이익하락과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2011년 일본 가정용 게임시장이 전년보다 11%나 감소하는 등 2008년부터 4년 연속 시장 규모가 축소했다는 발표도 있었다.
다양한 활로와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인 만큼 급성장을 지속하는 PC게임과 온라인 게임 시장으로의 진출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기업도 소비자도 과거의 영광에 취해 새로운 항로 개척에 소극적이다.
일본 경제의 폐쇄적 경향을 비유하는 갈라파고스 현상이 게임업계마저도 침체로 몰아넣고 있다는 의견이 속출하고 있다.
◆게임 없는 일본 PC방
일본에도 한국의 PC방 같은 공간이 다수 존재한다. '넷토카페(ネットカフェ)'라는 이름으로 주요 역이나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는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컴퓨터만을 사용하는 곳이 아닌 만화방과 DVD 방을 겸하고 있어 기호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PC방을 연상하고 게임을 즐기기 위해 간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설비가 제대로 갖춰진 곳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JR닛포리 역 근처 넷토카페. 벽면 가득 만화책이 채워져 있고 각종 주간지나 신문 등도 구비되어 있다. 뒤쪽 공간에 마련된 개인 부스 안에는 PC가 설치되 각종 영화부터 성인 콘텐츠까지 규정 요금만 지불하면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 구조이다.
물론 PC에는 게임도 설치돼 있다. 원하는 온라인 게임을 미리 점원에게 말하면 설치해준다는 공지도 붙어있다. 그러나 문제는 PC의 성능.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이나 최근 나오고 있는 패키지 게임 등을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낡아 보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점원은 "플레이스테이션 등의 가정용게임기와 소프트를 구비하고 있다. 이곳에 게임을 즐기기 위해 오는 손님도 콘솔 게임을 찾는다. 이곳에서 일한 지 3달 정도 됐지만, 아직 PC용 온라인 게임을 요구하는 손님을 본 적이 없다. PC는 대부분 영화 감상용이나 인터넷 서핑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점원의 이야기처럼 PC 화면에는 영화를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사이트나 성인물 감상 콘텐츠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게임 콘텐츠로 설치된 것은 장기나 바둑 등의 간단한 게임뿐이었다. 간혹 보이는 온라인 게임 역시 모바일게임 등 저사양 게임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고사양의 컴퓨터와 깨끗한 설비를 앞세워 손님유치에 나서는 넷토카페도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한국이라면 기본적으로 깔린 스타크래프트조차 볼 수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낮은 그래픽 사양과 작은 모니터(18인치)가 게이머에게 만족을 줄지는 의문이다.
◆PC게임 경시하는 갈라파고스 일본
넷토카페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은 PC 게임에 흥미가 없다. 일본 전역에 고루 퍼져 있는 넷토카페에서 PC 게임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점은 소비자들이 PC 게임을 찾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일본의 게임 전문 사이트 jin115.com에 일본에서 PC 게임이 인기가 없는 이유를 분석한 외국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다. 기사에서는 '일본인의 기호가 세계적 표준과 거리가 있다', '일본의 PC 게임은 오타쿠(매니아)같은 열광적인 구입 층을 위한 소규모 비즈니스 모델이 많다', '오랜 가정용 게임기의 발전에 안주한 게임업계' 등 크게 3가지 이유를 들며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를 지적했다.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문화가 다르면 게임의 기호도 다른 법. 일본인의 게임 기호에 지나친 간섭이다', '서양 게임의 캐릭터가 불편하다. 일본애니와 같은 귀여운 캐릭터가 없어 몰입도나 재미가 떨어진다' 등 일본 문화에 맞지 않기 때문에 서양 PC 게임이 일본에서 인기가 없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PC 게임이 뒤질 뿐 가정용 게임은 일본이 압도하고 있다. 기술이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치고 나갈 수 있는 자신이 일본에 있다', '높은 게임력을 자랑하는 콘솔 게임들이 즐비한데 굳이 PC 게임을 즐길 이유가 어디 있나' 등 세계 콘솔 게임기 시장을 선도한 일본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하는 글귀도 보인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PC 게임을 경원시하는 경향이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
일본 유명 모바일 업체의 게임 관련 분야에서 10년 이상 종사하고 있는 야기 히로시 씨는 일본인의 게임 기호가 세계적 표준과 달라진 것이 그 원인이며, 배경에는 일본 게임기업들이 이제껏 성공해 온 세계 전략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야기 씨는 "일본에서는 가정용 게임기가 메인이고 PC게임은 마이너리티가 된 계기가 1983년 닌텐도의 가정용게임기 ‘패밀리컴퓨터’의 출시이다. 대히트를 기록한 패밀리컴퓨터는 당시 컴퓨터를 웃도는 그래픽 성능과 비교적 저가격이었다는 이점이 있었다. 또한, PC보다 훨씬 간단한 조작으로 게임을 즐긴다는 점, PC게임의 주도권을 당시 서양이 쥐고 있어 일본이 파고들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점 등이 일본 기업들을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게임기업들은 가정용 게임기를 통해 세계시장에 먹히는 게임을 개발하면 시장을 선도, 확대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됐고 실제로 이후 많은 기업이 PC대신 가전용 게임기를 선택해 소프트나 하드웨어 개발을 진행했다.
야기 씨는 "일본 기업의 선택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플레이스테이션을 비롯해 콘솔 게임기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일본애니와 함께 일본 특유의 게임 캐릭터들이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근 20~30년 사이 끊임없는 성장에 방심했다고 해야 할까, 관성이 붙었다고 해야 할까. PC와 인터넷의 무한한 가능성을 등한시했다. 급성장하는 세계 PC게임시장을 보면서도 모바일과 가정용 게임 개발에만 신경을 쓸 뿐 PC게임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이점이 끝까지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근년 닌텐도를 비롯한 일본게임업체들의 매출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 빠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PC게임의 개발에 큰 경험이 없어 기업들의 선택지에서 PC게임이라는 항목은 찾아 볼 수 없다"며 안일한 일본 게임업계를 비판했다.
또한, 해외 게임업체들이 온라인 다운로드 등으로 매출의 활로를 활발히 개척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패키지 판매 등의 전통적인 유통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일본에서 PC게임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라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안주했던 기업들의 영향으로 일본 소비자들도 PC게임의 수용에 소극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전부터 'PC게임은 가정용 게임기에 비해 조작이 불편하다', '매니아적인 요소가 많아 즐기기 힘들다' 등의 PC게임에 관한 인식이 있어 왔지만, 최근에는 PC 자체를 게임을 위한 도구로 보고 있지 않은 경향이 정착하고 있다고 일본의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게임 전문 사이트 jin115.com는 "게임은 가정용 게임기나 휴대폰으로 하고 PC는 일하기 위한 도구라는 확실한 구분이 생겨나면서 일본에서 더욱 PC게임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애초 기업들이 PC게임 대신 가정용게임을 선택한 이유가 현재 기업들의 PC게임 진출에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자승자박이다"고 지적했다.
가정용게임기 시장에 몇십 년을 안주한 일본기업과 세계 PC게임 시장의 눈부신 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일본 소비자. 디아블로3 이상의 대작이 나와도 당분간은 일본에서 PC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를 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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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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