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조인식 기자] A는 자신의 눈에서 멀어져가는 타구를 바라보았다.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한 듯 A는 1루에 반쯤 도달하기도 전에 양 손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1-4로 뒤지던 경기를 한 방에 원점으로 돌리는 동점 스리런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A가 황급히 뛰기 시작한다. 담장을 넘어갈 것 같던 타구는 A의 마음속에만 있었던 것일까? 타구는 좌측 펜스를 맞고 나왔고, 여유롭게 베이스를 돌 것 같았던 A는 분주히 1루로 돌아갔다. 2-4로 뒤지던 경기에서 득점권에 진출하지 못해 상대를 압박하는 데 실패한 A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2012년 5월 30일)
반면 B는 포기하지 않는 주루플레이로 팀의 추격 의지에 불을 당겼다. B는 팀이 0-1로 뒤진 9회말 1사 후에 타석에 들어섰다. 유격수 왼쪽으로 흐르는 타구를 날린 B는 거구를 이끌고 1루까지 전력질주했다.
타구가 유격수-3루수 사이의 깊은 곳으로 굴러가 충분히 내야안타가 될 타구였지만 B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동점과 역전의 의지를 몸소 표현했다. 이 내야안타가 시발점이 되며 팀은 9회 짜릿한 끝내기 역전승을 거뒀다. 연패 끝에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연승이었다.(2012년 6월 24일)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여기서 A와 B는 동일인물, 바로 KIA 타이거즈 나지완이다. 나지완은 지난 5월 30일에 얻은 뼈저린 교훈을 잊지 않았다. 6월 24일의 투지는 어쩌면 한 달 전에 뼈에 새긴 아픔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순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지완의 몸을 아끼지 않는 슬라이딩은 승리의 시발점이 됐고, 이 승리로 SK 와이번스에 1패 뒤 2연승을 거둔 KIA는 기세를 올려 잠실에서 LG 트윈스와의 3연전을 스윕하기에 이르렀다. 파죽의 5연승이었다.나지완이 24일 경기에서 추격의 불씨를 살리는 조연 역할을 했다면, 26일 경기에서는 빛나는 주연이 됐다. 나지완은 26일 5타수 3안타 4타점으로 KIA의 승리를 이끌었고, 3안타 중 하나는 '진짜 홈런'이었다.
나지완은 자신이 히어로가 된 26일 경기가 끝난 뒤, 24일의 슬라이딩 이후 팀 분위기가 더욱 좋아진 것 같다는 말에 "그날 선배들이 네 덕분에 이겼다는 말을 많이 해주셨다"고 답했다. 빈 말이 아니었다. 나지완의 슬라이딩 하나는 연승에 대한 KIA의 의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 슬라이딩은 '팀 전원 삭발'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다.
프로야구 정규시즌은 6개월에 걸친 장기 레이스지만, 때로는 한 순간의 플레이가 이미 결정된 듯 했던 팀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2004년 밤비노의 저주를 깬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들이 뉴욕 양키스와의 홈경기에서 벌인 벤치 클리어링 사건이다.
2004년 7월 25일(한국시각) 펜웨이 파크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양키스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레드삭스 투수 브론슨 아로요가 던진 공이 자신의 몸에 맞자 흥분했다. 로드리게스는 1루로 나가면서 포수 제이슨 베리텍과 맞서게 됐고, 로드리게스가 욕설을 내뱉자 베리텍은 참지 않고 포수 미트로 로드리게스의 얼굴을 뭉개버렸다.
그러자 경기장에 있던 그 누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양 팀 선수단 전체가 그라운드로 몰려나왔고, 포스트시즌에서도 보기 힘든 육탄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경기는 레드삭스의 2004년을 돌아봤을 때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가 됐다. 레드삭스는 속개된 경기에서 9회말 빌 뮬러가 기적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마리아노 리베라를 무너뜨리며 분위기를 탔다.
상승세를 이어가며 그해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를 거머쥔 레드삭스는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양키스를 만나 3연패 뒤 두 번의 끝내기 포함 4연승으로 월드시리즈에 오르는 기쁨을 만끽했다.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레드삭스의 분위기를 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월드시리즈를 4연승으로 끝낸 레드삭스는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며 밤비노의 저주를 깼다.
KIA의 5연승도 한 순간에 전환된 분위기가 불러왔다. 물론 2일 조영훈이 KIA 유니폼을 입었고, 같은 날 선수단은 단체 삭발로 연패탈출을 다짐하는 등 연승에는 많은 출발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트레이드와 삭발은 어디까지나 '게임 준비의 영역'이다. 결국 팀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경기 중 일어나는 결정적 반전의 순간이다. 한때 역적으로 몰렸던 나지완이 한 방에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KIA로서는 이 분위기를 잘 이어가는 일만 남았다. 과연 나지완은 타이거즈의 베리텍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의 성급한 판단을 아쉬워하는 나지완(위)-홈런을 치고 여유 있게 베이스를 도는 나지완.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 DB]
조인식 기자 조인식 기자 nic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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