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박찬호가 전격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한화는 29일 박찬호(39)가 은퇴한다고 발표했다. 박찬호는 30일 오전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모든 궁금증을 풀어낼 예정이다. 이로써 코리안특급과 한국 야구팬들이 함께한 19년도 막을 내리게 됐고 제 2의 인생을 살게 됐다.
박찬호는 1973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중동초-공주중-공주고를 나왔다. 한양대 2학년이던 1994년 1월엔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와 계약하며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거가 됐다. 메이저리그에선 LA 다저스-텍사스 레인저스-샌디에이고 파드레스-뉴욕 메츠-LA 다저스-필라델피아 필리스-뉴욕 양키스-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거쳤다. 2010년까지 17년간 빅리그서 476경기에 나와 1993이닝을 던졌고, 124승98패 평균자책점 4.36을 기록했다. 그의 124승은 지금도 깨지지 않은 아시아인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승이다.
박찬호는 1994년 당시 계약금 120만 달러, 연봉 10만 9000달러를 받았다. 그해 곧바로 빅리그로 승격했다. 1994년과 1995년엔 합계 4경기에 나섰고, 1996년엔 선발로 10경기서 5승 5패를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1996년 4월 7일 시카고 컵스전에서 4이닝 3피안타 7탈삼진 4볼넷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커리어 첫승을 따냈다.
1997년 본격적으로 풀타임 선발로 뛰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 자리 수 승수를 따냈다. 이 기간 75승 49패를 기록하며 다저스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IMF 시절 온 국민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태평양 건너 전해오는 그의 시원한 투구와 승리 소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청량제와도 같았다. 그의 쾌투는 한 동안 방송사 애국가 화면에 삽입됐을 정도였다.
박찬호는 2001시즌 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연봉 6500만 달러짜리 FA 잭팟을 터뜨리며 돈방석에 앉았다. 시련이 시작됐다. 허리 통증에 타자친화적인 알링턴 볼파크를 홈으로 사용하면서 부진에 빠졌다. 에이스 부담감도 있었다. 2002년 9승에 그친 박찬호는 2003년 단 7경기만 출장한 채 재활에 들어갔다. 이후 FA 먹튀로 한동안 비난을 받았다.
그는 2005년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 되며 내셔널리그로 돌아왔다. 텍사스와 샌디에이고 성적 합계 12승을 따내며 재기에 성공했다. 2006년에도 7승을 거뒀다. 장출혈을 겪으며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지만, 수술 후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오뚝이 같은 투혼을 보여줬다.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마운드도 밟았다.
2007년엔 뉴욕 메츠와 계약했으나 단 1경기만 나선 뒤 마이너리그로 강등됐고 방출당했다. 이후 휴스턴과 계약을 맺었으나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2008년엔 8년만에 다저스로 컴백해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았다. 이후 구원투수로 전업해 필라델피아,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등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간 뒤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2011년엔 아내의 고향인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다.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42경기에 출전, 1승 5패 평균자책점 4.29를 기록했다. 올 시즌엔 특별법을 거쳐 고향팀 한화에서 뛰었다. 한화에선 23경기에 출전, 5승 10패 평균자책점 5.06을 기록했다. 지난해와 올핸 사실상 전성기가 지난 가운데 투혼을 불살랐다. 올핸 한화에서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이렇게 박찬호의 화려했던 한-미-일 프로 19년 인생이 마감됐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그의 일구 일구에 울고 웃었고,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한국에 메이저리그를 알려준 선구자도 박찬호였고, 다른 선수들에게 프로페셔널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선수도 박찬호였다. 이제 박찬호는 선수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30일 기자회견에서 들을 수 있다.
[박찬호.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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