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박찬호의 은퇴, 말로 표현 못할 적적함이 감돈다.
박찬호(39)가 은퇴했다. 당분간 국내 야구 팬들은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야구도 세월이 흐르면서 수 많은 불세출의 스타를 떠나 보냈지만, 박찬호는 또 다른 의미의 스타다. 적어도 박찬호의 전성기와 함께 추억을 공유했던 사람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그는 국민의 눈물샘과 웃음보를 동시에 자극했던, 몇 안 된 스타였다.
▲ 태평양을 건넌 선구자, 한국 사람들 메이저리그에 눈을 뜨다
박찬호는 1993년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서 뛸 때 LA 다저스 스카우트들에게 눈에 띄었다. 계약금 120만달러, 연봉 10만 9천달러에 다저스 푸른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무대를 밟은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게 메이저리그행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박찬호는 1994년 곧바로 메이저리거로 승격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너리그로 추락했다. 1995년까지 메이저리그 통산 4경기 출전에 그쳤다. 그 역시 눈물 젖은 빵을 씹어야 했다.
박찬호가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거 생활을 시작한 건 1996년이었다. 4월 7일. 선발 라몬 마르티네스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구원등판해 4이닝 7탈삼진 3피안타 4볼넷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미국진출 3년만에 거둔 감격스런 첫 승이었다. 또 훗날 아시아인 메이저리그 최다 124승의 시발점이 된 승리였다.
그 시점쯤 한국 국민들도 빅리거 박찬호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외신으로 접할 줄 알았던 메이저리그 소식을 스포츠뉴스로 접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경인방송에선 그의 선발등판 경기를 생중계하며 본격적으로 한국에 메이저리그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탁 트인 다저스타디움에 탄성을 내질렀고, 박찬호 도우미 게리 쉐필드와 라울 몬데시 등 당시 빅리거들의 경기 장면을 감상하는 건 덤이었다.
▲ 1997년~2001년 75승 쾌속질주, IMF 시름 덜어준 청량제
그의 선수시절 최절정기는 1997년~2001년이었다. 이 기간 그는 5년 연속 두 자리수 승수를 따내는 등 75승 49패를 기록했다. 1998년과 2001년 15승을 달성했고, 2000년엔 무려 18승을 따냈다. 150km를 웃도는 특유의 강속구에 커브와 슬라이더의 변형 구종인 슬러브로 메이저리그 정상급 타자들을 연이어 돌려세웠다. 코리안특급이라는 별명도 이때 생겼다.
공교롭게도 그가 승승장구했던 시기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와 절묘하게 겹쳤다. 한국은 1997년 IMF의 원조를 받아야 할 정도로 경제가 어려웠다. 서민들의 삶이 팍팍했다. 박찬호는 당시 그들에게 과장을 좀 보태서 영웅이었다. 그의 시원시원한 쾌투는 청량제였다. 저녁에 우울한 마음에 소주 한잔 기울이던 서민들의 기분 좋은 안줏거리였다. 오전에 직장과 학교에서 몰래 TV를 틀어 박찬호 선발 등판 경기를 보려고 했던 경험은 누구나 다 있을 것이다.
▲ FA 먹튀 오명, 희로애락을 함께 겪다
좋았던 기억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박찬호는 2001시즌 후 FA자격을 얻었다. 당시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는 그에게 5년 6500만 달러라는 대박 계약을 안기며 텍사스 레인저스로의 이적을 결정했다. 불행의 서막이었다. 텍사스 언론의 박찬호에 대한 기대감은 엄청났다. 에이스 대접을 받는만큼 부담도 컸다. 타자친화적인 알링턴 볼파크 적응은 정교한 제구력이 아닌 구위를 바탕으로 타자를 윽박지르던 그의 스타일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다저스 시절 막바지 찾아온 허리 통증이 본격적으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2002년을 그럭저럭 버텼지만, 지역 언론은 9승에 그친 에이스를 그냥 두지 않았다. 비난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2003년과 2004년엔 각각 단 7경기와 16경기에 나서는 데 그쳤고 고작 5승을 따내는 데 그쳤다. 주위에선 FA 먹튀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한동안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잘못된 FA 계약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국민들의 마음은 반반으로 갈렸다.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컸고, 일부에선 실망의 목소리도 있었다. 가장 괴로운 존재는 박찬호였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었지만, 묵묵히 견뎠다. 결국 2005시즌 중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 되며 내셔널리그로 복귀했다. 그해 12승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2006년에도 7승을 따냈다. 당시 시즌 막바지 장출혈로 생사의 기로에 서며 국민들을 염려시키기도 했다. 처음으로 뛴 포스트시즌 마운드에서 투혼을 펼치던 모습이 생생하다.
▲ 먼 듯 가까웠던 코리안특급,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2007년 이후 또 내리막길을 걸었다. 뉴욕 메츠에서 단 1경기 등판 후 마이너리그로 내려갔고, 방출 당했다. 휴스턴에서는 아예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지도 못했다. 2008년 구원투수로 7년만에 다저스 컴백을 한 뒤 2009년 필라델피아, 2010년 뉴욕 양키스와 피츠버그를 끝으로 빅리거 생활을 마쳤다. 그해 10월 2일 플로리다전서 통산 124승째를 따내며 동양인 빅리거 최다승 투수로 기록됐다. 2011년과 2012년엔 일본 오릭스와 한화에서 뛰며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돌이켜보면, 박찬호는 항상 야구 팬 곁에 있었다. FA 먹튀로 평가 절하됐던 시절, 다시 마이너리거가 됐던 시절, 부상으로 힘겨웠던 시절 모두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항상 당당했다. 한국 국민들 앞에선 언제나 바른생활 사나이였고, 한국 팬들을 위해 2012년 한화에서 최선을 다해 공을 던졌다. 방콕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2006년 WBC까지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를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바쳤다. 비 시즌이면 박찬호 장학회와 야구대회를 통해 유망주들과 교감했다.
보통 스타들은 팬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쓴다. 누구나 굴곡을 겪지만, 팬들은 쉽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미지 메이킹을 적절히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찬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줬다. 국민들은 최대한 그의 본 모습 그대로를 뇌리에 새겼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와의 19년 야구인생은 추억이 됐다. 완벽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정감이 갔다. 그렇게 지난 19년간 국민 곁에 있었다.
박찬호는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친숙한 스포츠 스타였다. TV 애국가 방송 장면에 주먹을 불끈 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괜스레 미소가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국민을 울리고 웃겼던 코리언특급, 박찬호가 잠시 후 은퇴기자회견을 열고 야구 선수의 삶을 마친다. 그의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릴 것이고, 아쉬운 마음에 격려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야구 선수 1명 은퇴 발표에 그런 감정을 느낄 기회가 앞으로 또 있을까.
당신에게 코리안특급 박찬호는 어떤 존재였나요.
[LA 다저스 입단하는 박찬호(위), 기술을 전수하는 박찬호(중간), 한화 유니폼을 입고 투구하는 박찬호(아래). 사진 = gettyimageimage/멀티비츠,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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