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NBA
[마이데일리 = 부산 김진성 기자] 국보 센터가 떠났다.
‘국보급 센터’ 부산 KT 서장훈이 19일 전주 KCC와의 홈 경기를 끝으로 정든 코트를 떠났다. 서장훈은 1974년 6월 3일생으로 휘문중학교-휘문고등학교-연세대를 졸업하고 1998년에 청주 SK에서 데뷔했다. 2002년엔 FA 자격을 얻어 서울 삼성으로 이적했고, 2007-2008시즌을 앞두곤 다시 FA로 전주 KCC로 이적했다. 한 시즌을 채우지 못한 채 시즌 중반 트레이드로 인천 전자랜드로 넘어갔다. 전자랜드에서 2010-2011시즌까지 뛰었다. 2011-2012시즌엔 창원 LG로 트레이드가 됐고, 올 시즌 부산 KT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서장훈은 이날 전까지 통산 687경기서 22802분 7초간 뛰었다. 평균 33분 11초다. 득점은 이날 전까지 13198점이었고, 평균 19.2점이었다. 야투 시도는 총 10200회였고, 성공률은 51.2%였다. 5233리바운드를 잡았고, 1077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876개의 블록에 355개의 스틸을 기록했다. 1999-2000시즌 첫 우승을 맛본 그는 2005-2006시즌 다시 한번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를 꼈다. 총 플레이오프 11차례에 뛰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 신촌의 골밑 제왕, 국보 센터 싹을 보다
서장훈은 휘문고 시절부터 장신센터로 이름을 드높였다. 1993년 연세대에 입학한 뒤로는 성인 무대를 휩쓸었다. 1993-1994년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정상으로 이끌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연세대는 기아자동차, 삼성전자 등 실업 강호를 연달아 쓰러뜨렸다. 골밑에서 서장훈을 막을 자가 없었다. 1995년 농구대잔치에선 고려대전서 결승 버저비터를 넣는 등 한국 농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때부터 국보급 센터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이창수, 표필상, 박상관 등 당대 실업 농구 센터들을 힘과 세기에서 눌렀다. 그가 골밑에서 리바운드 하나를 잡지 못하는 게 이변이었고, 블록슛을 당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골밑에서 서장훈이 공을 잡으면 그야말로 1골이었다. 서장훈은 그렇게 대학 시절부터 국내 최고 센터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비록 NBA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미국 연수도 1년간 다녀왔다.
▲ 프로입단, 우승의 맛을 보다, 절정에 치닫다
서장훈은 1998년 신생팀 청주 SK에 입단했다. 필생의 라이벌 현주엽과 한솥밥을 먹었다. 오래가지 못했다. 현주엽은 조상현과 트레이드 돼 KTF로 이적했고, 서장훈은 재키 존스와 트윈 타워를 형성하며 SK를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서장훈은 이후 FA 자격을 얻어 삼성으로 이적했고, 국내 최고의 센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외국인 센터가 득세하던 시기에 인사이더로선 유일하게 평균 20점 넘는 점수를 기록하면서 고군분투했다. 전매특허인 정확한 미들라인 슛도 이때가 절정이었다. 서장훈에게 3~4m 중거리슛은 자세만 제대로 잡고 던지면 한 골이었다. 이후 3점슛을 던지는 등 슛 거리를 늘리면서 일부 팬들에게 외곽 슛만 쏘는 센터라는 비난도 받았으나 센터로서 그런 기량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 없인 이뤄지기 힘든 일이었다. 실제 골밑에서도 그는 어지간한 외국인선수와 1대 1로 붙어도 기술과 힘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풋워크, 페이크, 부드러운 슛 터치 등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서장훈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무대에서도 맹활약했다. 겨울에는 소속팀에서, 여름에는 국가대표팀에서 봉사를 했다. 한국농구가 센터 서장훈 없인 얘기를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딱히 장기간 입은 부상도 없었다. 매 시즌 성실하게 뛰었고, 삼성, KCC, 전자랜드 등을 거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 서장훈을 위한 변명, 그리고 10000점
서장훈에게 좋은 수식어만 따라붙는 건 아니다. 그는 수 년전 부터 목에 보호대를 차고 살아왔다. 또 지나치게 승부욕이 강해 심판들과의 마찰도 심했다. TV 화면에 육두문자를 한 장면이 잡혀 페널티를 받기도 했다. 실제 후배들은 그를 어려워하는 선배 중 1명으로 꼽는다. 또한, 수비를 게을리하고 이기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서장훈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전창진 감독은 “1년 데리고 있어봤는데 그렇게 성실한 선수는 처음 봤다. 무릎에서 피가 나와서 도저히 뛸 수 없는 몸인데도 아무런 군소리 없이 똑같이 훈련을 소화했다.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한 선수였다”라고 했다. 이어 “그런 마찰은 서장훈 본인의 욕심이다. 그만큼 농구에 대한 열정이 뛰어난 것이다”라고 했다.
서장훈도 이날 은퇴경기를 앞두고 “나를 좋지 않게 보신 분께는 죄송하다. 그러나 나는 내 농구에 한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 경기에도 은퇴식 보다 어떻게 하면 경기를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다”라고 했다. 그 정도로 승부근성이 뛰어나다. 1998년 데뷔 후 서장훈보다 오래 뛴 선수는 없다. 그는 올해 한국나이로 불혹이다. 몸 싸움이 심한 센터가 마흔까지 뛰는 것 자체가 대단한 자기관리와 승부욕이다. LG 시절과 올 시즌 부상과 부진. 그가 프로답지 못한 게 아니라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결과였다. 심판들과의 마찰. 강한 항의. 그 역시 승부를 향한 열정이었다.
서장훈이 쌓아올린 기록들은 찬란하다. 그 중에서도 통산 10000점 대기록을 잊을 수 없다. 1998년 11월 14일 대구 동양전서 첫 득점에 성공한 뒤 1999년 11월 23일 수원 삼성전에서 1000점을 기록했다. 이어 2003년 2월 16일 울산 모비스전서 5000점을 기록했고 전자랜드 시절이던 2008년 11월 19일 창원 LG전에서 10000점을 돌파했다. 이날 전까지 13198점을 올렸던 그는 기어코 13200득점을 돌파했다. 은퇴경기서 33점으로 13231점을 기록하며 현역 생활을 마쳤다.
그도 인간이다. 서장훈은 확실히 최근 2~3시즌간 힘들었다. 자신을 둘러싼 각종 좋지 않은 루머에 배우자와의 이혼 등으로 홍역을 치렀고, 무릎 등 몸도 좋지 않았다. 서장훈은 KCC전까지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농구 코트를 누볐다. 그는 “코트는 쇼 버라이어티하는 곳이 아니다. 치열한 승부를 벌여야 하는 곳이다”라고 했다. 서장훈이 그렇게 떠났다. 서장훈은 마지막까지 프로였다. 서장훈은 서장훈이었다.
[서장훈. 사진 = 부산 곽경훈 기자. kphoto@mydaily.co.kr]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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