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나 카레니나', 맹목적이어서 더 진실하게 다가오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치명적인 사랑!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고풍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러운 극장의 굳게 닫힌 막 위에 연극 제목인 '안나 카레니나'가 각인되고 음악이 흐르면서 '1874년 제정 러시아'라고 쓰여진 중간 막이 오르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무대 중앙엔 한 남자가 앉아있고 투우사처럼 빨간 천을 휘두르며 한 사내가 무대에 등장한다. 빨간 천을 남자의 몸에 두르고 양손에 칼을 부딪치면서 면도할 준비를 하는 그는 면도사이다.
그리고 면도사에게 몸을 맡긴 남자는 안나 카레니나의 오빠인 귀족 오블론스키(매튜 맥퍼딘)이다. 또 다른 쪽에선 오블론스키의 아내 돌리(켈리 맥도널드)가 아이들의 아침 문안 인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다른 쪽 무대에선 아침을 맞이한 안나 카레니나(키라 나이틀리)가 하녀들의 도움으로 거창하게 옷을 입고 있다. 하녀의 시중을 받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온 오빠 오블론스키의 편지를 읽고 있다.
아이들의 가정교사와 외도를 하다 발각된 오빠의 부탁으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안나의 여정으로 시작되는 로맨틱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의 2012년도 작품인 '안나 카레니나'는 주요 배경을 연극무대와 극장으로 끌어들여 대담한 시도로 새로운 실험의 환상적인 조합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의 감독 조 라이트는 연극적인 공간을 통해 급템포로 진행되는 무대 전환으로 자연스런 공간 이동은 물론, 자유자재로 공간을 넘나드는 카메라 워크로 미끄러지듯 거침없는 원샷의 묘미를 각인시켜준다.
무엇보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극중극을 연기하듯 과장된 모습으로 자연스레 투입되면서 전개되는 공간 이동은 화려하게 전환되는 무대 세트는 물론, 무대 옆과 뒤, 무대 위의 통로와 극장의 객석 전체를 활용하여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18세에 명망 있는 정치가와 결혼한 안나 카레니나는 1870년대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 사교계의 꽃이다. 그녀의 곁에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정치가 남편 카레닌(주드 로)과 8살 난 아들이 있다. 친오빠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홀로 모스크바행 기차에 오른 안나 카레니나는 브론스카야 백작부인과 마주 앉게 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안나는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브론스카야 부인의 아들인 젊은 장교 브론스키(애런 존슨)를 만나게 된다.
첫눈에 안나에게 반한 브론스키는 집요하게 그녀를 따르지만 브론스키가 오빠의 처제인 키티의 애인인 것을 알게 된 안나는 애써 브론스킨을 외면한다. 하지만 안나는 브론스키의 저돌적인 애정공세에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그들의 맹목적인 사랑이 불러온 치명적인 스캔들은 도덕적 비난을 몰고 와 안나를 파멸시킨다.
불륜의 대명사로 각인된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의 하나이다"라는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처럼 여러 차례 영화화되어 인기를 모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그레타 가르보 주연,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의 1935년도 작품과 비비안 리 주연, 쥴리앙 듀비비에 감독의 1948년도 작품, 그리고 소피 마르소 주연, 버나드 로즈 감독의 1997년도 작품이다. 세 작품 모두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출연하여 각자의 개성을 부각시켰지만 원작의 위대함을 뛰어넘는 작품은 없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이며 대문호이자 종교가였던 레오 톨스토이가 1869년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고 1877년, 49세에 집필을 마무리한 '안나 카레니나'는 1899년에 발표한 '부활'과 함께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진실한 사랑과 결혼, 예술과 종교, 죽음 등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특히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의 연애와 결혼제도,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톨스토이는 미모의 상류사회 유부녀 안나의 불륜의 사랑을 통해 1870년대 러시아 사회상황을 여러 각도로 반영하였다.
조 라이트 감독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부각시키면서 연극적인 장치인 무대를 통해 안나를 파국으로 몰아간 러시아 상류계층의 문화와 허세를 재현한다. 무엇보다 안나 역의 키라 나이틀리는 격정에 휩싸인 안나의 감정선을 순수함과 도발적인 매력으로 각인시켜 순수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현대적인 안나 카레니나를 보여준다.
그런 만큼 순수하면서도 정직했던 안나가 금지된 사랑으로 사교계에서 매장당하고 브론스키의 사랑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의심과 집착으로 파멸 직전에 이르는 과정의 심리를 극명하게 보여준 키라 나이틀리의 열연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또한 브론스키 역의 애런 존슨은 처음엔 잘생긴 바람둥이 이미지로 부각되지만 안나와의 진정한 사랑이 각인되면서 비극적인 사랑의 대가를 치루는 브론스키의 고뇌를 부각시켜 연민을 자아낸다. 특히 10년 전이라면 당연히 브론스키 역으로 낙점되었을 주드 로가 안나의 불륜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남편 카레닌을 맡아 냉정하면서도 차분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조 라이트 감독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육적인 사랑과 대조적인 지고지순의 사랑으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콘스탄틴 레빈과 키티의 사랑을 각인시키면서 바람피우는 안나 오빠 오블론스키와 인고의 세월을 참아내는 그의 아내 돌리를 통해 보편적인 부부생활을 통해 공감대를 자아낸다. 특히 원작에서 레빈이 톨스토이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로 그린 만큼 이 영화에서도 레빈의 삶이 이상적이라는 원작의 의도를 시사 해 준다.
무엇보다 화려한 볼거리가 가득한 이 영화에서 음악과 의상, 미술, 촬영이 뛰어나다. '어톤먼트'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음악은 금년도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화려한 의상과 함께 안나와 브론스키가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검은 드레스로 치장한 안나와 하얀 장교복을 입은 브론스키가 아무런 대사 없이 오직 춤 동작으로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서로를 탐닉하는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인 장면으로 부각된다.
또한 영화 속 경마장 장면은 당연히 야외 로케로 진행될 거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극장 메인 객석 중앙에 거대한 방목장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 1, 2층 객석을 각각 상류층과 노동자 계층으로 배치시켜 배타적인 귀족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런 만큼 2층 객석 중앙에 안나를 배치시켜 무대에서 벌어지는 경주 도중 낙마하는 브론스키의 모습과 놀라는 안나를 대비시켜 이 영화의 독특한 연극식 구성 무대 중에서 기차역 장면과 함께 미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장면을 연출한다.
이 영화에서 야외 로케로 영화적인 영상을 부각시킨 장면은 레빈이 시골에 있는 자기 집으로 찾아가는 장면과 레빈이 들판에서 농부들과 일을 하는 장면에서 시원스레 펼쳐지는 러시아 평원의 대자연이다. 또한 안나가 브론스키와 별장으로 도피하여 초원에서 밀애를 즐기는 장면은 실제 영국의 유명한 솔즈베리 평원에서 촬영하여 아름다운 숲과 초원이 어우러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브론스키와 처음 만나던 기차역에서 인부가 기차에 깔려 죽는 사고가 안나의 자살에 대한 복선으로 이어지는 이 영화는 연극무대로 시작해서 다시 연극무대로 끝이 난다. 들꽃이 만개한 들판에서 안나의 남편과 아들, 그리고 브론스키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딸 안야가 평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으로 끝이 나는 이 영화는 그 들판의 꽃들이 극장의 무대와 객석 가득히 배치되면서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는 것을 상기 시켜준다.
"남의 아내를 존경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저는 불륜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욕정만을 위한 욕정은 탐욕일 뿐이죠. 일종의 식탐이에요. 신이 인간에게 신성한 것을 오용할 자유를 주신 건 인간다운 인간이 되라는 뜻에서 입니다"라는 레빈의 말처럼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욕정만을 위한 탐욕일까? 돌팔매질을 당해야 하는 불륜일까?
맹목적이어서 더 진실하게 다가오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치명적인 사랑!
이 영화는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두근두근 시네마로 시대의 희생양으로 비극으로 마감한 안나와 브론스키의 금지된 사랑에 아련한 아픔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사랑에 이유가 필요하나요?"라는 브론스키의 대사가 귓전을 맴돈다.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영화 '안나 카레니나' 스틸컷. 사진 = UPI 제공]
김미리 기자 km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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