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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쉴 때요? 서점에 가서 여행 책을 사 갖고 와요. 집에 와서 그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제가 그 나라들을 여행하는 느낌이 들어요. 가고 싶은 장소를 발견하면 '여긴 꼭 가 봐야지' 하고 책 모퉁이를 살짝 접어두죠."
여행을 좋아하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논산에서 자란 이 여자아이는 모델이 되겠다며 주말마다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눈이 크고, 목소리가 밝은 아이. 친구들은 이 아이를 '엄탱'이라고 불렀다.
잘생긴 남자 배우 고수가 좋았다. 논산에 고수가 사인회를 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긴 줄을 서 기다린 끝에 떨리는 손을 내밀고 수줍은 얼굴로 잘생긴 남자 배우의 사인을 받았다. 고수의 사인은 이 여자아이의 첫 번째 보물이었다.
여자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여고생들의 선망이던 패션잡지의 모델이 되었다. 자신이 꿈꾸던 일이었다. 그리고 2005년 시트콤 '레인보우 로망스'에 출연했다. 주인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TV를 본 사람들은 예쁜 얼굴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이 아이의 이름을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엄현경'. 그렇게 이 여자아이는 별이 되었다. 영원히 반짝거릴 줄만 알았던 '스타'.
"연기를 하고 싶단 마음을 먹고, 겨우 6개월 만의 일이었어요. '레인보우 로망스'에 들어가게 된 건. 연기 연습을 할 시간도 없었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운은 좋았나 봐요. 계속 다른 작품들을 하게 됐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시작했으니 당연히 연기를 잘하지 못했고, 그걸 저마저 느끼게 됐어요. '내가 연기를 못하는구나. 재능이 없는 건가'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배우의 길은 제가 가기에는 너무 힘든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재능이 있어도 잘되기 힘든데, 재능까지 없다니…' 결국 다른 길을 찾을 마음으로 일을 그만뒀어요. 배우가 아닌 직업을 찾으려고요."
시간만 어김없이 흘렀다. 해가 바뀌었고, 시간에 잠식되어 가는 꿈이 깊어질 때쯤, 우연히 엄현경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다시 뛰었다. 처음 패션잡지 모델이 되었던 그때처럼. 잘생긴 남자 배우가 눈을 마주치며 사인을 건네줄 때처럼.
"어느 날 TV를 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확하게 어떤 캐릭터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한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볼 때였는데, '나도 저 캐릭터를 연기해 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요. 그때는 다시 연기를 해야겠단 마음이 전혀 없던 시절이거든요. 그래서 채널을 돌렸는데 다른 드라마를 봐도 '저 캐릭터도 한 번 연기해 보고 싶다. 내가 연기할 때는 왜 저런 캐릭터를 생각 못했지? 만약 내가 그만두지 않았다면 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끝에 든 생각은 '다시 연기하고 싶다'였다. 하지만 이름이 잊혀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다시 연기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전 너무나 빨리 잊혀진 뒤였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니까 이쪽 일이 얼마나 힘든 건지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제가 처음 데뷔했을 때는 모든 게 정말 쉽게 됐던 거였어요."
하지만 연기를 멈춘 시간만큼이나 연기가 늘어있진 못했다. 드라마 '천상의 화원 곰배령'에 캐스팅돼 대본 리딩을 하러 다른 배우들과 만난 날, 엄현경의 북한 사투리 연기는 전설적인 배우 최불암의 성에 차지 못했다. "네가 그렇게 하면 우리 드라마 망쳐!"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래도 엄현경은 움츠리지 않았다. 한 번 포기했다 돌아온 길이었다.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오기 혹은 열정이 있었고, 그때 느꼈다. '열심히 하면 뭐든 안 될 게 없다'란 사실. 실제 탈북 여성을 만나 북한 사투리를 배우고 따라 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북한 사투리는 그곳 사람들은 쓰지 않는 어설픈 흉내란 것도 알았다. 누군가 특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북한 사투리요"라고 대답할 수준까지 됐고, 다시 대본 리딩을 하러 최불암을 만난 날, 엄현경의 연기에 최불암은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드라마 '마의'에선 역사 속에 없던 소가영을 맡았다. 오디션만 한 달. 겨우 합격한 뒤에도 출연까지 대기하는 시간만 몇 달이 넘었다. 시놉시스에 나온 건 단 세 줄뿐인 소가영. 역시 걱정되고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병훈 PD의 연기 지도에 따라 소가영을 창조했다. 그의 연기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현실로 끌어와 드라마 속에 녹여냈으며, 그 발랄한 눈빛이 TV에서 다시 반짝였다. 사람들은 다시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엄현경'
"톱스타나 인기에 대한 욕심이요? 그런 건 없어요. 지금이 좋아요. 할머니가 되어서도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배우. '마의'를 촬영하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있는데요. 밤샘 촬영을 자꾸 하다 보니까 너무 피곤했거든요. 그런데 보조 출연자 분들 중에 제게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진짜 하나도 힘들지 않고, 한 분 한 분 고맙기만 했어요. 반대로 생각하면 제게 별것 아닌 사인 하나일 수 있지만, 그 분들에게는 작은 기쁨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런 생각에 제 기분이 참 좋아지고 행복해지더라고요."
모델을 꿈꾸고, 줄을 서 고수의 사인을 받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엄현경이란 여자아이는 여전히 여행 중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 혹은 아무도 가지 못했던 곳들을 천천히 주위를 살피면서 느린 걸음으로 여행 중이다.
엄현경은 서점에서 구입한 싱가포르 여행 책의 한 페이지를 살짝 접어놨다. "그 수영장에 가서 꼭 한 번 수영해보고 싶어요. 꼭이요."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은 곳에 있는 푸른 수영장. 그곳에서 실컷 수영을 한 뒤, 이 여자아이는 다시 밑으로 내려와 또 한 권의 여행 책을 살 것이다. 앞으로 또 가야 할 그곳이 있는 책을.
[배우 엄현경. 사진 = 한혁승 기자 hanfoto@mydaily.co.kr]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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