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네 쿵후 실력을 함부로 내 세우지마라. 너의 문파가 최고라 말하지 마라. 쿵푸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직과 수평! 지는 자는 수평이 되고 최후에 수직으로 서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되고 술잔을 기울이다 이어지는 엽문의 충고로 시작되는 '일대종사 (The Grandmaster)'는 2007년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와 2008년 '동사서독 리덕스'로 잠잠했던 왕가위 감독의 작품이다.
그의 이전작인 1994년 '동사서독', 1997년 '해피 투게더', 2004년 '2046' 처럼 긴 촬영기간과 6년이라는 긴 기획 때문에 복귀작으로 볼 수 있지만 필립 르 소드 촬영감독외에 총 6명의 촬영감독이 투입되어 촬영에만 3년이 걸린 이 영화는 그런 만큼 가장 왕가위다운 그의 후속작이다.
2013년 제 63회 베를린영화제와 2013 중국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공개된 이 영화는 예술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의 이야기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무술 액션을 보여준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정지된 명화 같은 영상과 선문답 같은 철학적인 대사들로 구성된 이 영화는 그런 만큼 영웅담을 보여주는 무술 액션영화가 아니라 무술을 무예의 경지로 끌어올린 고수들과 지나간 시대를 통해 인간의 실존적인 고독과 우수를 각인시킨 왕가위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광동 남해 불산 사람이다. 아버지 엽해다는 홍콩문함서가에서 남북행을 경영했고 불산 사람들은 엽씨를 배덕리엽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배덕리는 엽씨들이 다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조상이 남긴 재산이 있어서 40세까지 먹고 사는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7세 때 부터 내 유일한 취미인 영춘권을 배웠고 내 사부님은 진화순이었다. 불산 영춘권은 양찬 선생님(1826-1901)부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제 3대 제자이다. 사부님이 나를 받아주셨을 때 그는 70세였다.
제자가 되던 날, 사부님은 띠를 직접 내 몸에 매주시면서 자기 띠는 자기 명예이며 띠를 매는 것은 연무하는 자를 상징하고 처신할 때 항상 이 명예를 생각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광서, 선통, 민국, 북벌, 항일, 그리고 내전을 겪었다. 마지막으로 홍콩에 도착했고 사부님 말씀에 의지하여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라는 엽문의 나레이션과 흘러가는 세월을 스케치하듯 잔잔한 영상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이소룡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영춘권을 전파한 실력자이자 영춘권의 '일대종사'인 엽문((1893-1972)의 삶과 그가 살다간 시대를 세련된 영상으로 보여주는 전기영화라고 짐작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개봉되어 큰 인기를 끈 견자단 주연의 엽문 씨리즈가 엽문의 활약상을 빠른 템포와 파워플한 액션, 극적 재미가 가미된 드라마로 무술액션을 부각시킨 것과는 달리, 소리도 속도도 없이 마치 춤사위같은 슬로우 모션의 동작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각인시켜면서 삶 전체를 관통하는 무예의 경지와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와 회한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이다.
그런 만큼 장대비 속에서 수 십명과 벌이는 엽문의 첫 결투 장면은 일대종사인 엽문의 무예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오프닝이다.
5분 동안 펼쳐지는 오프닝의 무술 액션은 엽문의 모자챙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튀어오르면서 보여지는 물방울은 물론, 치고받고 싸우는 인물들의 육체와 사물에 튀어오르는 다각적인 물의 향연은 최대치의 흥분과 쾌감을 일으키는 급템포의 액션보다 미학적 영상의 극치로 관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왕가위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각인시켜준다.
"네 칼은 너무 날카롭다. 칼집에 잘 숨겨야 한다."면서 궁대인은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던 제자 마삼(장즈린 분)대신 남방 무술의 새로운 실력자인 엽문을 후계자로 생각한다.
궁대인은 무술이 아니라 재치싸움으로 자기 손에 있는 전병을 뺏어 보라고 엽문에게 제의한다. "선생님은 이 전병을 무림이라 생각하지만 저한테는 세계입니다. 소위 대성약결, 세상의 크기입니다."라면서 엽문은 영춘권을 남북으로 전파하려는 궁대인의 뜻보다 더 큰 세상에 전파하겠다는 야심과 포부로 궁대인과의 재치싸움에서 이긴다.
하지만 궁대인의 딸 궁이(장쯔이 분)는 후계자로 임명하려는 아버지를 제지하고 궁가는 패한 적이 없다면서 엽문에게 대결을 청한다.
궁이는 엽문과의 대결을 통해 그의 인품과 실력에 반하지만 유부남인 엽문에 대한 사랑을 품고 헤어진다. 사랑을 나누듯 펼쳐진 대결의 순간을 마음에 품고 헤어진 둘은 편지에 마음을 담아 주고받지만 일본의 침략과 함께 그들의 운명은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무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천지, 마지막으로 중생을 보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통해 자신과 천지는 보았지만 중생을 보지 못했다는 궁이의 회한과 엽문에 대한 그녀의 숨겨진 사랑은 그동안 왕가위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엇갈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다시금 각인시켜준다.
그런 만큼 실제 인물인 엽문을 그린 영화에선 존재조차 없었던 궁이라는 허구의 캐릭터를 부각시켜 "인생에서 후회가 없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회한을 보여주는 만큼 이 영화는 전기영화도, 시대극도, 무술 액션영화도 아닌, 매 장면마다 그림을 그리듯 공을 들인 유려한 영상과 철학적인 대사로 결국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연민과 회한을 절절하게 느끼게 해 준다.
물론 공을 들인 미학적 영상은 때론 작위적인 것처럼 느낄 수 있고 뚜렷한 스토리와 중국에선 익히 알려진 고수들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전개는 다소 불친절하지만
이 영화의 포인트인 영상미를 음미하며 본다면 새로운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영화는 피곤한 상태에서 본다면 잠이 쏟아지는 영화로 화끈한 액션과 갈등구조가 뚜렷한 멜로를 기대한다면 가장 재미없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좋은 컨디션에서 소설을 정독하듯 꼼꼼하게 영상의 흐름을 음미한다면 이 영화는 물론, 왕가위 감독의 전작들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과 표정을 물과 연기의 이미지로 부각시키고 눈보라 치는 설경과 사계절을 담은 영상은 흐르는 세월에 대한 회한을 극대화 시킨다.
특히 슬로우 모션으로 극적 긴장감과 미적 쾌감을 느끼게 해 주는 오프닝의 대결 장면, 궁대인과 엽문의 전병 빼앗기 장면, 마치 춤을 추듯 엽문과 궁이가 합을 이루는 대결 장면, 그리고 기차역 안에서 벌이는 마삼과 궁이의 대결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으로 가장 아름다운 무술 액션을 보여준다.
거의 정중동에 가까운 카메라 워크로 서로의 심리를 대변하는 격투 장면은 휘몰아치는 격투의 박력과 극적 재미 대신 극적 심리를 부각시켜준다.
"내 아내는 장영성(송혜교 분)이고 청나라 전양무대신 장음환의 자손이다. 사소한 말실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보통 때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해서 연회가 있으면 아내를 금루에 데리고 갔다.그때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양가의 여자들이 금루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흔치 않았다. 그래도 내 아내는 음악을 듣기 위해 금루에 갔고 다른 사람의 입소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밤에 나갈 때마다 내 아내는 앞문에 등을 항상 켜놓았고 내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렸다. 내 인생에 사계절이 있다면 40세 이전은 전부 봄인 것 같다."라는 엽문의 나레이션처럼 어떤 고난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의 아내 장영성은 송혜교의 차분한 존재감만으로도 연민을 자아내면서 각인된다.
1938년, 불산이 일본군에 함락되고 대저택과 모든 재산을 일본헌병부에게 빼앗긴 엽문은 아내와 자식들을 불산에 보내고 홍콩으로 건너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고, 궁이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일본군에 합류한 제자 마삼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궁가의 유일한 64수의 후계자인 궁이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결혼과 아이를 갖는 것은 물론 무예를 전수하는 것도 포기한다.
그런 궁이의 선택과 고독한 삶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우리 가족은 봄에서 바로 겨울로 가는 것 같았다."라는 엽문의 밥벌이를 위한 고달픈 삶과 대비되면서 긴 여운을 남겨주는데 엽문의 내면을 부각시켜주는 왕가위의 페르소나인 양조위와 잎사귀 밑에 숨겨진 꽃의 아름다움과 복수를 결심하는 냉철한 여성의 양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쯔이의 열연은 이 영화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인물은 팔극권의 마스터 일선천(장첸 분)이다.
1939년, 궁이가 서북대학 견습생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다 궁이의 도움을 받는 일선천은 1950년 홍콩, 엽문이 무술을 가르치며 생활하던 그 당시, "산자는 들어올 수 있지만 죽은 자만 나갈 수 있다."는 조직의 서언을 깨뜨리고 결투 끝에 조직을 탈퇴하고 1952년 이발소를 차리는 에피소드에만 등장하여 사족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기념 사진을 찍고 그 흑백사진이 변색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한때 유명했던 고수로서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만으로도 기억할 만 하다.
실력이 전부인 엽문의 고단한 삶과 중국 근현대사에 기록된 고수들을 반추하는 이 영화는 색 바랜 흑백사진과도 같이 좋았던 한때였던 무술의 황금시대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회한과 무림보다 험한 현실의 삶에 대한 연민을 곱 씹게 한다.
1958년 중국 샹하이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란 왕가위 감독의 1988년도 작품 '열혈남아', 1991년도 작품 '아비정전', 1994년도 작품 '동사서독'과 '중경삼림', 1995년도 작품 '타락천사', 1997년도 작품 '해피 투게더', 2000년도 작품 '화양연화', 2001년도 작품 '2046', 2008년에 재편집한 '동사서독 리덕스'는 바로 이 영화와 맥을 같이하는 작품으로 다시한번 볼 만할 두근두근 시네마이다.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영화 '일대종사' 스틸컷, 사진 = 와인스타인 컴퍼니 제공]
남태경 기자 tknam1106@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