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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용서는 위대하다. 용서를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용서가 성사되는 순간 깊었던 증오와 미움 그리고 죄책감까지 삽시간에 사라진다. 용서의 기적이다.
그리고 '밀양'이란 영화가 있다. 용서에 관한 영화다. 다만 용서의 기적을 말하는 건 아니다. 배우 전도연이 주연한 이 영화는 용서의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용서는 과연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또 제3자가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이런 역설적 의문이 우리에게 남긴 '밀양'의 외침이었다.
SBS '송포유'를 보며 치기 어린 학생들의 장난에 웃음이 나질 않고, 학생들의 도전이 별다른 감동을 주지 않는 건, 또 때로는 불편하기까지 한 건 용서의 부재 탓이다.
학생들 중 일부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다. 가해자가 있단 건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것일 테다. 하지만 '송포유'에 피해자의 이야기는 없다. 가해자들의 폭력 이야기가 일방적으로 쏟아졌다. 대중이 폭력의 가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의 그런 경험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피해자들은 그들을 용서했는지, 그래서 마음 편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 건지 제시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가해자들의 뉘우침이라도 비쳐졌다면 좀 나았을지 모르겠다. 대중이 그들을 용서하려 들었지 모르니까. 하나 '밀양'에서 말했듯 제3자인 대중이라고 그들을 용서할 자격이 있긴 할 걸까 싶다. 분명한 건, 이런 과정이 선행되지 않은 채 가해자의 폭력 고백을 듣기란 썩 내키는 일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리고 노래는 위대하다. 홀로 노래하는 목소리는 불안할지 몰라도 그 목소리가 여럿이 되면 각각의 목소리가 서로를 조율하며 거대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노래에 사연이 더해지고 그 사연이 노랫말에 녹아 든다면, 지금까지 숱하게 들었던 평범한 노래도 어느 순간 특별한 감동이 되는 걸 체험할 수 있다. 노래가 사연을 담아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포유'의 합창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한 사연을 노래가 담아갔다면 말이다. 하지만 '송포유'는 학생들의 방황을 단순하게 나열했고 마스터들과 부딪히는 과정을 보여주다가 연습을 통해 차츰 화음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전개됐다.
특별한 사연은 없었다. '왜 그들은 합창 대회에 나가려 하는 걸까'에 대한 명확한 답을 '송포유'는 제시하지 않았다.
물론 거칠게 성장하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꿈과 목표를 쥐여 주려는 의도가 보여지긴 하다. 그렇지만 지극히 예능스러운 배경음악과 자막으로 학생들의 폭력 고백과 문신 등을 포장한 연출은, 학생들에게 합창대회란 목표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 하는 의구심을 낳았고, 그들의 고백마저 가볍게 비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송포유'의 가장 큰 비극은 학교 폭력의 가해 학생들이 방송이 나간 후 이제는 오히려 비난의 도마 위에 올라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버렸단 것이다. 이들이 '송포유'를 통해 혹 얻었을지 모를 상처는 누가 치유해주며 누구의 책임일까. 학생들이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역설을 '송포유'가 만든 거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과연 누가 용서를 구할 수나 있을까.
[SBS '송포유' 포스터. 사진 = SBS 제공]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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