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책을 좋아하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동네 만화방에서 무협소설을 잔뜩 빌려와 읽곤 했죠. 책 읽는 속도가 무척 빠른 형을 따라잡다 보니까 덩달아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특히 일본 무협소설을 좋아했죠. 중국 무협소설이 과장이 많았던 반면, 일본 무협소설은 현실적이었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리얼리즘에 매료된 셈입니다.
대학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그때 영화 ‘자객 섭은낭’의 원작 소설을 읽게 됩니다. 한자로 1800자 밖에 안 되는 짧은 이야기였는데,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뛰어난 암살자 섭은낭(서기)이 한때 사랑했던 남자(장첸)를 죽여야 하는 딜레마를 다룬 소설이었습니다.
20대 청년은 언젠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훗날 ‘비정성시’ 등에 대만 현대사의 굴곡을 담아 ‘카메라를 든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은 세계적인 거장 허우 샤오시엔(69) 감독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나이 일흔을 앞두고 20대의 막연했던 꿈을 스크린에 옮겼습니다.
27일 만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일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빛이 형형했습니다. 종이를 뚫는다는 표현을 하죠. 데뷔 이후 처음으로 무협 장르에 도전했다는 설렘도 엿보였습니다.
보통의 무협영화가 컷을 잘게 나누고,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 클로즈업도 자주 쓰면서 지상을 박차고 붕붕 날아다니는 과장된 액션을 쓰곤 합니다. 허우 샤오시엔은 중력의 법칙에 어긋나는 무협은 만들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과 주변 풍경을 함께 담아내기 위해 롱샷과 롱테이크로 차분하게 가라앉혔습니다. 대사를 최소화하고, 감정의 진폭을 미묘한 떨림과 고요한 침묵으로 표현했죠. 숲 사이를 헤치는 바람과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 소리, 그리고 예기치 않게 덮쳐오는 구름이 자객 임무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섭은낭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당나라 시대를 고증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실제 나무 기둥을 박아 건물을 짓기도 했죠. 당나라 시대와 비슷한 건물이 남아 있는 일본까지 건너가 촬영을 했습니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호수와 산, 숲의 모습을 담기 위해 중국과 대만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도교의 종이인형을 등장시킨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무협영화를 만들면서도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리얼리스트이길 원했습니다. 대만 현대사 뿐 아니라 당나라의 역사도 사실에 기반을 둔 ‘진짜의 세계’로 담아냈습니다. 실제 원작소설 자체가 섭은낭을 제외하곤 모두 실존인물이었습니다.
허우 샤오시엔은 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1순위로 ‘세계관’을 꼽았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창작을 할 수 있느냐고 되묻더군요. 그는 허다한 무협영화의 클리셰를, 마치 섭은낭이 단도를 휘두르듯 단칼에 잘라버리고 자신만의 무협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창작자의 시각은 영화를 만드는 기초공사입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을 어떻게 영상화할지 상상하는 작업은 그 위에 세워지는 건물이겠죠. 거장은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에서부터 어떤 배우가 어떤 연기를 할지 상상한다고 합니다. 현장에선 리허설을 안 하고요. 이미 모든 구상이 끝났으니까요. 그리고 카메라를 멀찌감치 떨어뜨려놓고(롱샷), 오랫동안 지켜보는(롱테이크) 거죠.
‘비정성시’로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자객 섭은낭’으로 칸 감독상을 수상한 그는 “상상력은 영화가 아니라 책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자극 받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영화에 담습니다. 책은 상상력입니다.
[사진 제공 = AFP/BB NEWS. 영화사 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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