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배우들은 문득 마음 한구석이 헛헛해질 때가 있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꿈만을 향해 달려가다가도 문득 뭔가 채워지지 않는 마음에 헛헛함이 밀려온다. 깊은 감성을 지녔기에 그 감정은 더 배우들을 휘감는다.
뮤지컬배우 전성민 역시 이 헛헛함에 씁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헛헛함은 결국 그녀의 빈 곳을 채우는 감정이기도 했다. 전성민이라는 배우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고, 모든 감정을 그 자체로 고스란히 느껴지게 만들었다.
과거 김유영으로 활동했던 전성민은 최근 개명 후 새로운 이름으로 배우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 다른 이름으로 새롭게 활동하는 것이 어찌 보면 모험일 수도 있지만 이것 저것 따지다 보면 결국 진짜 자신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이제 전성민도 알고 있다. 전성민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성민은 “전성민이라는 이름이 중성적이기도 하고 이미지가 나랑 잘 맞는 것 같아 나쁘지 않다. 개인적인 일로 이름을 바꾸게 됐는데 전성민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나니 작품이 더 다양하게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하다”며 웃었다.
다시 활동에 박차를 가한 전성민은 최근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공연을 마친 뒤 뮤지컬 ‘명동 로망스’에 합류했다. 뮤지컬 ‘명동 로망스’는 2016년 꿈도 없이 시간이 흐르는대로 사는 공무원 선호가 1956년으로 타임슬립해 그 시대의 예술가 이중섭, 전혜린, 박인환을 통해 가슴 속의 뜨거운 것을 발견하고 그들처럼 자신만의 세상, 꿈을 가지게 되는 작품. 극 중 전성민은 실존 인물 전혜린 작가 역을 연기한다.
전성민은 전혜린 작가가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20대 중반, 힘들었던 그녀의 마음을 치유한 사람이 바로 전혜린 작가였다. 우연히 전혜린 작가의 책을 읽게 되면서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성민은 전혜린 작가 덕에 자신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치유할 수 있었다.
“전혜린 작가가 책에서도 그렇고 가장 많이 얘기했던 단어가 ‘광기’와 ‘권태’예요. 정말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열정이 광기를 품게 하는데 그럼에도 항상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권태를 느끼는 거죠. 그게 저와 비슷했어요. 어릴 때 가정 환경은 물론 다르지만 전 어릴 때 희망보다는 허무함을 많이 느꼈거든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하루 하루가 너무 고되고 힘들었어요. 배우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랬죠. 배우로 처음 데뷔했을 때도 좋은 작품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벅찼던 것 같아요. 모든게 다 처음이다 보니까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고 어떻게 해나가야 잘 해나가는 건가. 작품이 끝나면 난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고민이 많았어요. 끊임 없이 고뇌에 빠졌죠. 근데 그런 면들이 전혜린 작가와 닮은 것 같아요.”
끊임없이 고민하던 20대 중반, 전성민은 전혜린 작가를 알게 됐다. 그의 작품은 생각보다 더 큰 위로가 됐다. ‘아,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자신보다 더 앞서 세상을 살았던 그 누군가도 이미 겪었던 고뇌이기에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전성민의 20대를 잡아준 전혜린 작가를 연기하게 되다니 “운명이다”고 말할만 하다.
전성민은 “전혜린 작가를 연기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너무 영광이고 운명 같았다”며 “존경하는 연출님도 함께 해서 더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초연 때 함께 하지 못하고 이번에 합류하게 됐는데 부담이 엄청나요. 초연 멤버들에게나 실존 인물과 관련된 분들에게나 불편한 지점이 있지 않을까 걱정됐죠. 워낙 제 자신한테 관대하지 않아서 사실 걱정과 부담이 너무 커요. 그래도 무대에서 또 다른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발전시켜야 하고요. 감사하게도 주위에서 전혜린이라는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전성민에게 ‘명동 로망스’ 속 전혜린은 생각보다 더 흥미로웠다. 단순하게 어둡고 시니컬한 모습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상황에 맞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 예술인으로서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다. 특히 그녀의 순수함이 와닿았다.
“순수하지 않으면 절대 창작의 길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예나 지금이나 ‘순수함’이 많이 공감돼요. 시대가 변해도 예술에 대한 순수한 마음은 항상 똑같이 갖고 있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죠. 사실 순수한 마음을 지키는 것은 힘들어요. 예술이라는 장르 자체도 굉장히 모호해졌고, 저 역시 ‘내가 하는 게 예술이 맞나’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명동 로망스’는 희망을 가졌어요. 물론 비극적인 삶의 주인공들이지만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느낌을 받았죠. 우리가 느낀 희망이 관객들에게도 전해질 거라 생각해요.”
전혜린 작가를 작품 속 인물로 만나보니 역시나 매력적이었다. 앞선 작품에서도 진부한 역할을 해오지 않았던 전성민에게 전혜린 작가의 특별함은 배우로서도 만족감을 갖게 했다.
“내가 참 작품 복이 있다고 생각한 게 이제까지 해왔던 작품을 보면 다른 작품에서 표현되는 여자 캐릭터와는 좀 다른 캐릭터를 맡아 왔다”고 밝힌 전성민은 “여자 캐릭터에 다양성이 부족했던 게 사실인데 ‘명동 로망스’에서도 배우들이 욕심낼 만한 캐릭터를 연기하게 돼 정말 좋다”고 고백했다.
다른 배우들과는 조금 다른 인물을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성민만이 뿜어내는 분위기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전성민은 차분하면서도 솔직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숨기지 않았고, 포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전성민만의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이는 곧 배우로서의 전성민 매력을 배가시키는 듯 했다.
“처음 배우를 시작할 때를 떠올리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러다 갑자기 작품이 주어졌고, 많은 신인 배우들이 하고 싶어 하는 역할을 맡게 됐어요.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무조건 잘 하려고만 했어요. 전체적인 제 삶에 있어서는 어떻게 살아가는 게 배우로서 올바른 길일까 많이 고민하던 시기기도 했죠. 사실 지금도 그 성격이에요. 마음에 여유가 없죠. 부담되고 떨리고 긴장되고.. 근데 그게 저를 살게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없으면 재미 없었을 것 같거든요.”
사실 전성민은 자신이 이토록 긴장감을 즐길 줄 아는 배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린 시절 몸이 좋지 않아 학교를 자주 나가지 못한 탓에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단체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연극반 생활이 전성민의 인생을 바꿔놨다. 선생님 권유로 시작하게 된 연극반은 단체 생활의 재미를 알려줬고, 자신밖에 모르던 전성민이 다른 기질의 사람에게 호기심을 갖고, 또 이해하게 되는 시간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배우 생활은 쉽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됐지만 마냥 즐길 수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돌아보면 재미있다가도 항상 뭔가 채어지지 않는 게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 전성민은 그럼에도 배우로 계속 살아가는 이유를 전했다.
“공연이 끝나면 허무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어요. 확실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불안한 삶 속에 계속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내가 이걸 하지 않으면 좀 나아지려나 싶기도 했죠. 그런 흔들림이 계속 있었고, 그래서 좀 쉬기도 했어요. 지금도 간혹 그런 마음이 생기긴 해요. 근데 여행도 하고 모험을 즐기면서 다시 마음을 잡고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다시 돌아온 그에게 힘을 준 것은 팬들이었다. 관객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전성민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고개를 든 전성민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너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결국 눈물을 흘렸다.
“한동안 배우를 진짜 그만두려고 마음 먹은적도 있어요. 주위에서 그걸 많이 걱정해 주셨고, 기다려준 분들도 있죠. 너무 고마운 게 그냥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거를 하는 것 뿐인데 절 좋아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게 너무 신기해요. 저의 발전을 위해서만 작품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돌아와줘서 고맙다’고 하는 분들의 마음을 전 몰랐던 거죠. 저는 저만 생각했지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이제는 저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기억하면서 그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전하고 싶어요.”
한편 뮤지컬 ‘명동로망스’는 오는 4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된다.
[전성민. 사진 = 유진형 기자 zolong@mydaily.co.kr]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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