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
[마이데일리 = 안경남 기자] ‘2002 한일월드컵 4강 주역’이자 도르트문트에서 뛰었던 이영표는 “축구에서 화려하고 훌륭한 기술도 결국은 단단한 멘탈에서 시작된다. 축구 선수에게 멘탈은 가장 강력하고 필수적인 요소”라며 정신력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축구는 때로 전술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과거 ‘이스탄불의 기적’과 바로 오늘 새벽 ‘안필드의 기적’이 바로 그렇다.
그만큼 축구는 복잡한 스포츠다. 감독의 모든 전술적인 선택은 결과론적일 수밖에 없다. 단지 실수를 줄이고 그 안에서 최상의 답을 찾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전술이 승패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리버풀의 극적인 승리를 잘 들여다보면, 위르겐 클롭과 토마스 투헬의 전술적인 승부수가 경기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필드 기적에 숨은 전술 이야기를 해보자.
#선발명단
리버풀과 도르트문트 모두 부상자로 인해 변화가 불가피했다. 클롭 감독은 부상으로 제외된 조던 핸더슨 대신 로베르토 피르미누를 선발로 내보냈다. 나머지는 1차전과 같았다. 디보크 오리기가 원톱에 섰고 피르미누가 처진 스트라이커로 뒤를 받쳤다. 투헬 감독은 2명을 바꿨다. 스벤 벤더와 에릭 두름(부상)을 빼고 카가와 신지와 소크라티스를 선택했다.
#포메이션
‘4-2-3-1’과 ‘4-2-3-1’이 충돌했다. 1차전과는 다른 접근법이다. 원정골을 넣고 온 클롭은 오히려 공격 숫자를 늘렸다. 홈 팬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투헬도 마찬가지였다. 골이 필요한 도르트문트도 카가와를 추가하며 기존의 변칙적이 스리백(back three:3인수비)에서 4-2-3-1로 변화를 줬다. 재미있는 건 이것이 과거 클롭의 도르트문트와 매우 유사했다는 점이다. 경기 템포를 매우 빠르게 가져가며 압박하고 역습했다.
주목할 점은 ‘삼격형 미드필더’다. 두 팀 모두 중앙에 2명의 미드필더를 기용했는데, 조합적인 측면에서 도르트문트가 더 효과적이었다. 리버풀은 엠레 찬과 제임스 밀너가 짝을 이뤘다. 엠레 찬이 빌드업(공격전개)과 수비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고, 밀너는 공격과 수비를 오가는 박스투박스였다. 문제는 찬과 밀너의 거리가 자주 벌어졌다는 점이다. 밀너가 너무 높이 올라가거나 측면으로 넓게 빠졌을 때 엠레 찬 혼자 남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도르트문트의 경기 초반 2골 장면이 대표적이다. 헨리크 미키타리안의 첫 골에선 밀너가 뒤늦게 내려왔고, 피에르 오바메양의 두 번째 골에선 엠레 찬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도르트문트는 곤살로 카스트로와 율리안 바이글의 간격이 비교적 좁게 유지됐다. 오바메양 득점에서 마르코 로이스가 피르미누의 공을 탈취할 때 카스트로와 바이글의 거리는 약 2m였다. 그러나 그 순간 엠레 찬과 밀너는 10m 이상 떨어져 있었다.
전반 10분이 지나자 리버풀은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벌어졌던 엠레 찬과 밀너의 간격이 좁아졌고 아담 랄라나에서 시작된 패스가 오리기의 슈팅으로 이어지며 기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오리기의 슈팅은 빗나가거나 로만 바이덴펠러 골키퍼에 막혔고 랄라나는 헛발질로 아쉬움을 삼켰다. 도르트문트도 더 달아날 기회가 있었다. 전반 31분과 36분 리버풀 측면에 쉽게 뚫리면서 오바메양이 두 차례 몸을 날렸지만 득점에 실패했다.
#후반전
변화 없이 후반이 시작됐고, 리버풀이 3분 만에 만회골을 터트렸다. 이번에도 골은 중앙 ‘삼각형 미드필더’ 싸움에서 나왔다. 간격을 좁힌 엠레 찬과 밀너가 피르미누와 연속된 이대일 패스를 통해 도르트문트 중앙을 관통했다. 반대로 도르트문트는 3명 ‘카가와-카스트로-바이글’이 간격을 좁힌 상태에서 너무 느슨하게 상대를 압박했다. 이래서 축구가 어렵다. 간격이 넓어도 문제고, 좁아도 압박이 느슨하면 의미가 없다.
#마츠 훔멜스
패스 잘하는 센터백의 가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중원 싸움이 치열하게 진행되면서 센터백은 이전보다 더 많이 빌드업에 관여하고 상황에 따라선 미드필더 지역까지 올라가 전방으로 공을 뿌려준다. 마츠 훔멜스는 패스에 능한 대표적인 센터백이다. 꾸준히 바르셀로나와 연결되고 펩 과르디올라가 다음시즌부터 지휘봉을 잡는 맨체스터 시티가 주목하는 이유다. 이날 훔멜스는 공을 소유했을 때 자주 전방으로 전진했다. 하프라인을 넘어 성공한 패스가 단 4개에 불과했던 소크라티스와 달리, 훔멜스는 무려 16개나 됐다. 그리고 이 중 1개가 로이스의 추가골로 연결됐다. 후반 12분 오리기가 전진하는 훔멜스를 압박했지만 이것을 이겨내고 뒷공간을 파고드는 로이스에게 완벽한 패스를 전달했다.
#교체카드
1-3이 되면서 3골이 필요해진 클롭은 교체로 승부수를 던졌다. 후반 17분 랄라나, 피르미누를 빼고 다니엘 스터리지, 조 앨런을 동시에 투입했다. 포메이션도 바꿨다. ‘4-2-3-1’에서 ‘4-4-2 다이아몬드’로 전환됐다. 이 변화가 준 효과는 중앙에서의 ‘수적 우위’였다. 4분 뒤 필리페 쿠티뉴의 추격골이 터질 때, 리버풀은 가운데서 ‘4 vs 3’으로 도르트문트보다 1명이 더 많았다. 미키타리안이 가세했지만 동시에 알베르토 모레노 역시 중앙으로 들어오면서 여전히 리버풀이 ‘5 vs 4’로 우위를 유지했다. ‘숫자 싸움’의 승리였다.
리버풀이 살아나자 투헬도 교체를 시도했다. ‘공격형 미드필더’ 카가와 대신 ‘3번째 센터백’ 마티아스 긴터를 내보냈다. 일종의 굳히기였다. 문제는 교체 타이밍이다. 보통 코너킥 등 세트피스 상황에서 선수를 교체하면 수비에 혼란이 생긴다. 사전에 수비 위치에 대한 지시를 주지만 곧바로 투입된 선수의 경우 반응 속도가 아무래도 느릴 수 밖에 없다. 후반 32분 마마두 사코의 헤딩골을 보자. 뒤늦게 들어온 긴터는 쿠티뉴의 킥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멘탈리티
이후 경기는 정신력 싸움이 됐다. 클롭은 후방에 교체로 들어간 루카스 레이바와 두 명의 센터백을 제외한 전원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이에 투헬은 수비 숫자를 5명으로 늘린 5-4-1로 방어에 나섰다. 기적은 후반 추가시간에 일어났다. 리버풀이 파울로 프리킥을 얻어냈고 스터리지가 측면으로 빠지며 공을 잡은 뒤 다시 쇄도하는 밀너에게 기막힌 패스를 연결했다. 그리고 이어진 크로스를 데얀 로브렌이 머리로 밀어 넣으며 경기를 뒤집었다. 도르트문트에게 아쉬운 점은 오바메양이 밀너를 끝까지 쫓지 않았다는 것과 박스 안에 많은 숫자가 있었음에도 선수가 아닌 공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안필드의 기적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클롭과 투헬의 전술적인 승부와 실수가 겹쳤고, 여기에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력’까지 더해지면서 역대급 ‘극장 경기’가 탄생했다. 클롭이 하프타임 라커룸에서 리버풀 선수들에게 전한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겠다. “장차 너희들의 아이들과 손주들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추억을 만들자”
[그래픽 = 안경남 knan0422@mydaily.co.kr/ 사진 = AFPBBNEWS]
안경남 기자 knan0422@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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