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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날 무서워해야할 걸! 너나 조커가 아니라. 나는 할리 퀸이니까!"
세계를 구할 히어로도, 우울한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다크 히어로도 아닌 크레이지 빌런 할리 퀸(마고 로비)이 새롭게 태어났다.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의 실패로 자존심을 구겼던 DC가 심기일전한 흔적이 역력하다. DC 영화 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감독인 캐시 얀과 배우 마고 로비를 필두로 세운 '버즈 오브 프레이'가 더 미쳐서 돌아왔다.
배트맨이 활동하고 있는 고담시티의 최강 빌런 조커와 그의 연인 할리 퀸(마고 로비). 두 사람이 헤어졌다. 할리 퀸은 "합의하에 헤어진 것"이라며 태연한 척 외치지만 실상은 혼란의 끝이다. 상실감에 젖어 방황하던 그는 이내 조커와의 추억이 담긴 화학공장을 폭파시키기에 이른다. 술김에 저지른 일이든, 감정에 휘둘려 저지른 일이든, 어쨌든 해방의 시작이다.
하지만 조커의 그늘이 사라지자 할리 퀸의 죄의식 없는 각종 기행에도 눈을 감던 자들이 그를 타깃으로 삼아 복수를 감행한다. 특히 로만 시오니스(이안 맥그리거), 이른바 블랙 마스크는 무방비 상태의 할리 퀸을 가장 기다려온 인물이다. 최대의 위기가 들이닥친 가운데, 설상가상 카산드라 케인(엘라 제이 바스코)이라는 아이의 손에 고담의 권력을 뒤흔들 다이아몬드가 들어가게 된다. 결국 할리 퀸은 카산드라 케인을 비롯해 각자의 사연을 가진 헌트리스(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르네 몬토야(로지 페레즈), 블랙 카나리(저니 스몰렛)와 함께 위기에 맞선다.
'버즈 오브 프레이'는 할리 퀸 솔로 무비의 시작이자 DC의 세계관을 확장할 새 팀업 무비이기도 하다. 영화는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조커를 지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아닌, 할리 퀸 스스로 온전히 빛을 내기 위한 선택이다. 줄곧 자신을 수식했던 타이틀이 사라지자 할리 퀸은 상처를 받고, 불안정함을 느끼지만 금세 특유의 대담함과 천진난만한 광기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정체성의 확립이다.
해방의 황홀감에 매료된 할리 퀸의 모습은 예측이 불가하지만 이 통제 불능 상태에서 오는 위험한 쾌감은 관객들마저 새로운 환상에 젖게 한다. 할리 퀸이 밝히는 본인의 심리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욕망은 여느 때보다 뚜렷해 매력적이다.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했던 제멋대로의 할리 퀸이 최소한의 도덕과 유대의 가치를 깨달아가는 성장 서사도 그려지지만 캐릭터의 성격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다.
이번 영화에 제작자로도 참여한 마고 로비는 과연 대체불가한 할리 퀸 그 자체다. 무참한 슬픔에 빠져있다가도 광기 어린 악동 짓을 펼쳐내는데, 조금도 과하지 않고 사랑스럽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강조됐던 섹슈얼한 부분은 배제됐고 카리스마와 역동적인 액션이 더해져 캐릭터가 생기를 되찾았고 빛난다.
다만 한 편에 낯선 인물들의 서사를 집약시키려 해 구성이 뒤죽박죽인 점이 아쉽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헌트리스, 로만에 묶여있지만 '죽여주는 목소리'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블랙 카나리, 부패한 고담시 경찰 조직을 경멸하는 몬토야 형사,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카산드라 등의 세밀한 이야기는 할리 퀸의 내레이션으로 처리되지만 다소 빈약하다.
이런 틈을 채워주는 건 총천연색이 펼쳐지는 화려한 색감과 압도적인 비주얼이다. 음울한 도시 고담이지만 컬러풀한 연출로 단숨에 발랄해지고 유쾌해진다. 변덕스러운 할리 퀸에 딱 맞는 팝아트적인 무대는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각양각색의 액션도 박진감이 넘친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적을 응징하는 건 할리 퀸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액션이며 석궁을 활용한 액션, 야구배트, 연막탄, 무술, 가라테 등 다채롭다. 특히 말미에 등장하는 부비트랩 놀이동산 액션씬은 변화무쌍한 서커스를 보는 듯한 짜릿함이 밀려온다.
무엇보다 마고 로비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여성들, 평범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야기다. 공동체가 가진 집단의식과 구정은 강력하며 그것이 우리가 영화에서 말하려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한 만큼 '버즈 오브 프레이'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한데 뭉쳐 연대라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남성들 간의 유대로 얽힌 견고한 고담 시티 세계관에서 할리 퀸과 여성들은 명백히 안티 히어로, 빌런이다. 고담 시티의 상위 권력자인 블랙 마스크 등의 계획을 깨트리고 이들의 삶을 휘젓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버즈 오브 프레이는 빌런이 되길 자처했다. '원더우먼'처럼 대단한 대의를 위해 행동하지는 않지만 홀로서기를 위한 것이며 억압을 탈피, 인생의 주체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다.
캐시 얀 감독은 "여성들이 연약하고 불완전한 것 같지만 강인하고 마지막에 무언가를 함께 이루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개개인은 시련을 겪고 고난을 겪지만 함께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메시지며 여성으로서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고 했다. 할리 퀸의 정체성을 제대로 정비한 '버즈 오브 프레이'. DC 무비의 새로운 서막이 올랐다.
[사진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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