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곽명동의 씨네톡]
2022년 1월 4일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 시사회장. 봉준호 감독이 깜짝 등장하자 관객들은 환호했다. ‘기생충’으로 칸과 아카데미를 휩쓸고 차기작 ‘미키 17’을 준비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일반 극영화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를 응원하러 온 것이 마냥 신기했다. 그는 “한국 노동사를 거창하게 말하기 이전에 개인 한 분 한 분에게 어떤 사연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지, 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사려 깊게 하나하나 풀어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재밌는 영화였고, 또 감동적인 영화였고, 사려 깊은 영화였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의 실타래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아름다운 화면으로 찍혀져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호평했다. 봉 감독은 그 해 자신이 뽑은 ‘10대 영화’ 중 하나로 ‘미싱타는 여자들’을 리스트에 올렸다(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오열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여자라서 혹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공부 대신 미싱을 탈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노동교실에서 공부하고, 근로기준법을 배우고, 동료애를 나누었던 청계피복 노조원들은 1977년 9월 9일 경찰의 탄압으로 결국 구치소에 수감돼 실형을 살았다. 이제는 60대가 된 여성들이 인터뷰에 나서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인데,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도 잊고 있었던 당시의 사진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중년의 나’는 ‘청년의 나’를 대면하며 힘겹게 살아온 세월을 가로지른다. 봉 감독은 한 매체에 “근래에 본 가장 아름다운 다큐멘터리였다. 전태일 말고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 그녀들의 기억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정성스레 축복해 주는 영화적 손길”이라고 또 다시 추천했다. 그는 이후에도 시간날 때마다 이 영화에 애정을 드러냈다.
‘미싱타는 여자들’의 공동감독이었던 이혁래는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를 내놓았다. 90년대 초, 시네필들의 공동체였던 ‘노란문 영화 연구소’의 회원들이 30여 년 만에 떠올리는 영화광 시대와 청년 봉준호의 첫 번째 단편 영화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둘러싼 기억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혁래 감독은 노란문의 막내 회원 출신이다. ‘미싱타는 여자들’과 ‘노란문’의 공통점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지난날을 회고하며 청춘의 한 복판으로 다시 들어가 삶의 열정을 일깨우는 데 있다.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2003)으로 해외 영화제에 나갈 때마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좋은 한국 감독들이 쏟아져 나온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그 시절 충무로는 봉준호 외에도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장준환, 김지운 감독 등의 영화가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노란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감독이 봉 감독에게 ‘노란문’ 다큐를 찍자고 제안했을 때, 봉 감독은 한 가지 당부를 했다. ‘나’를 중심에 두지 말고, ‘미싱타는 여자들’처럼 모든 회원들이 나오는 다큐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었다. 회원들은 봉 감독이 생애 최초로 연출했던 애니메이션 ‘룩킹 포 파라다이스’에 얽힌 각자의 기억을 펼쳐 놓는데, 일부 기억에 혼선이 빚어져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영화가 끝난 뒤 모두 감동을 받았다는 것. 어두운 지하실에 갇힌 고릴라가 자기가 싼 똥에서 변한 애벌레에게 쫓기며 지상낙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봉 감독은 독서실 총무로 일하며 번 돈으로 장만한 히타치 캠코더를 들고 고릴라 인형을 조금씩 움직이며 한 컷 한 컷씩 촬영해 이어 붙이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는 애니메이션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극영화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열정은 잊지 않았다. ‘미키 17’ 이후 봉 감독의 다음 작품은 심해 생물과 인간들이 얽혀있는 드라마를 다루는 '풀 CG' 애니메이션이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 노란문 회원들이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다시 감상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한 시절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 시절 ‘청년의 나’는 지금의 ‘중년의 나’에게 어떤 말을 걸어올까.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던 풋풋한 청춘은 시간의 강을 건너 어느덧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를 먹었다. 봉 감독은 “1992년, 1993년에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때만큼 열심히 열정적으로 영화에 미쳐있었던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룩킹 포 파라다이스’의 고릴라는 지하실을 빠져나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나무(파라다이스) 앞에 도착한다. 이혁래 감독은 그 나무 앞에 실제 노란문을 가져다 놓았다. 그 문은 닫혔다. 왜 열어놓지 않고 닫아 놓았을까. 꿈을 꾸고 사는 청춘들이 그 문을 힘차게 열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그 문을 여는 순간, 당신의 눈물이 핑 돌 것이다.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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