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유머러스하지만 가볍지 않은 씻김굿 [MD시사]

[마이데일리 = 김미리 기자] 오멸 감독의 흑백영화 '지슬'은 제주도 4.3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1948년 제주 섬 사람들이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들은 폭도로 간주한다'는 미군정 소개령을 듣고 피난길에 오르며 겪는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다.

가슴 아픈 역사적 소재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영화라고 예상하는 건 금물이다. '지슬'은 유머러스함을 잊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을 피해 도망치면서도 길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해 티격태격하고 집에 놔두고 온 돼지를 걱정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소소한 이야기들로 웃고 떠든다.

일부러 무거워지려 노력하지 않는 덕분에 '지슬'의 매력은 배가 돼 다가온다. 역사의 잔인했던 한 때를 극한까지 전하려 하지 않고 있다. 웃음기 어린 천진난만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은 더 처절한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지슬'은 절재돼 있지만 슬픔과 유머가 절묘하게 공존한다.

영상미도 '지슬'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다. 장면 하나하나가 잘 찍어 놓은 흑백사진을 떠올리게 하며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영화임에도 잘 쓰인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안긴다.

'지슬'은 제주도 출신인 오멸 감독과 배우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작품이다. 독립영화임에도 기함할 정도의 자본을 쏟아 붇고, 내로라하는 명장들이 총출동해 만들어낸 영화보다 더한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외관 속 제주의 이면에 숨겨진 슬픈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건 그 이후의 일이다. 영화를 통해 슬픔을 알게 된 사람들은 '지슬'을 보고 난 뒤 자연히 제주 4.3사건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다.

오멸 감독은 "'지슬'은 제주 4.3사건을 재현한다는 목적보다 당시 이름 없이 사라진 원혼들에게는 위로를, 아직까지는 가슴에 남겨진 자들에게는 상처가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됐다"고 밝혔다.

그는 마치 위령제를 드리듯 이름 없이 떠나야했던 원혼들에게 바치는 씻김굿을 준비했다. 이런 이유로 영화 자체도 제의적 형식을 띈 신위(영혼을 모셔 앉히다), 신묘(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소지(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 총 네 개의 시퀀스로 이뤄져 있으며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개봉했다.

오멸 감독은 언론시사가 시작되기 전 "너무 무장을 하고 오더라. 가벼운 마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말대로 '지슬'은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그 울림은 눈물 날 정도로 무겁다.

'지슬'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에 이어 2012 올해의 독립영화상을 수상했다. 제29회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심사위원 대상을 품에 안았으며, 만장일치로 대상을 결정하는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아 화제가 됐다. 또 제19회 브졸아시아국제영화제에서도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수레바퀴상을 거머쥔 바 있다. 러닝타임 108분. 지난 1일 제주도 개봉, 오는 21일 전국 개봉.

[영화 '지슬' 스틸컷. 사진 = 자파리필름 제공]

김미리 기자 km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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