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김진성 기자] 포스트시즌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프로야구가 대중화되면서 생긴 변화 한 가지. 야구장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는 자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물론 극빈층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야구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포스트시즌 들어 티켓 대란이 일어나고 있고 암표 문제가 심각한데도 야구장에 못 와서 아우성인 사람이 허다하다.
이들이 야구장을 찾는 이유. 좋아하는 팀과 선수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자신과 비슷한 생각과 마인드를 가진 사람과 소통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기 때문이다.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사회인들에겐 심리적인 탈출구가 시급하다. 짜릿한 승부가 벌어지는 야구장만큼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공간도 없다. 요즘 국내야구가 하향평준화라는 말이 나와도 여전히 국내 스포츠시장 부동의 1위를 유지하는 건 이유가 있다.
▲ 오너에 대통령까지, 반가운 야구장 나들이
정, 재계 인사들의 야구장 방문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부 구단의 고위층들은 사전에 연락도 없이 홈 경기를 방문해 VIP석도 마다하고 일반 관중석에서 관중들과 호흡한다. 포스트시즌도 마찬가지다. 국내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거물들이 잇따라 관중석에 출현했다. 두산은 이번 포스트시즌 내내 박용곤 명예회장, 박용성 중앙대학교 이사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박정원 구단주 등이 경기장에 나와서 열렬히 힘을 보탠다. 박용만 회장이 일반 관중석에서 다른 관중과 호흡을 맞춰 응원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과 이수빈 구단주도 3차전서 얼굴을 내비쳤다.
28일 한국시리즈 3차전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전격 시구에 나섰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올스타전 시구 이후 대통령의 국내야구 시구는 10년만에 성사됐다. 한국시리즈로만 따지면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시구 이후 무려 18년만이다. KBO와 청와대는 지난 1달간 비밀스럽게 연락을 주고 받으며 박 대통령의 한국시리즈 시구를 추진했다. 박 대통령은 시구 이후 2회까지 경기를 관전하면서 팬들과 어울렸다.
▲ 소통 불통시대, 오너들과 대통령이여 야구장을 찾아달라
한국 정치, 경제를 움직이는 기업 오너들과 대통령. 산적한 현안과 국정살림에 야구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한번쯤 짬을 내서 야구장에 방문하는 건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한 야구관계자는 “한국사회가 소통 불통 시대 아니냐. 정, 재계 거물들이 야구장에서 일반 팬들과 호흡하는 모습만 보여줘도 큰 의미가 있다”라고 했다.
물론 일각에선 “쇼”라고 할 수도 있다. 야구장 응원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좋게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고 지적한다. 선거 철만 되면 재래시장을 찾는 정치인들처럼 야구장 방문도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기 위한 것과 비슷하다는 것.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그조차도 하지 않는 정치인, 경제인들이 수두룩하다. 여전히 일반 팬들과 섞여 응원을 하는 데 “급이 맞지 않다”라며 거부하는 일부 구단 고위층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모 선수는 “구단 고위층께서 VIP석에서 계시다 경기 후 덕아웃에 내려와서 격려 한 마디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라고 했다. 이 구단 고위층 역시 선수들과 소통 및 스킨십이 유연한 편이다. 또한, 삼성의 경우 2년 전 이재용 부회장이 자택에서 경기를 관전하다 LG를 상대로 역전하자 갑자기 야구장을 방문해 선수단 전원에게 갤럭시 탭을 선물하며 힘을 주기도 했다. 이런 것 하나 하나가 오너와 선수단, 오너와 팬들의 커뮤니케이션이다.
▲ 묻지마 007행보, 거물들의 야구장 나들이 뒷이야기
삼성은 한국시리즈 3차전 당시 이 부회장의 잠실구장 방문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구단 관계자는 “연락도 안 하시고 시간 날 때 슬쩍 오셨다가 조용히 가신다”라고 했다. 괜히 구단에 부담을 주는 모양새가 싫어서 그랬던 것. 두산 역시 박 회장이 구단에 까다롭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야구가 좋아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응원 풍선막대를 두드린다고 한다. 권위의식은 전혀 없다.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 아무래도 보안이 철통생명인 대통령의 방문에 KBO와 청와대가 007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KBO는 일찌감치 청와대에 박 대통령의 시구를 정중히 부탁했고, 청와대로부터 갑작스럽게 시구 OK 연락이 올 걸 대비해 이번 한국시리즈 들어 시구 플랜A와 플랜B를 준비했다고 한다. 27일 3차전 당시 약 1시간 전에서야 취재진과 두산, 삼성 관계자들이 박 대통령의 잠실 방문 사실을 알았다. 지난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시구가 미리 알려져 보안상의 이유로 취소됐기 때문에 더욱 긴장되는 분위기였다.
박 대통령은 미리 정해진 동선에 따라 시구를 한 뒤 2회까지 관전을 하고 잠실을 떠났다. 청와대 경호처가 미리 KBO와 합의한대로 무사히 시구가 끝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시구 당시 그라운드엔 최소한의 인력만 있었다. 두산 야수들은 포수를 제외하곤 수비 위치에 나가지 않은 채 덕아웃에서 대기했다. 박 대통령을 에스코트한 양팀 마스코트 역시 청와대 경호원이었던 걸로 알려졌다.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야구장에선 경호가 쉽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시구 자체가 쉬운 게 아니라고 한다.
또 하나. 시구 이후 박 대통령은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면서 3루 덕아웃 앞에 나온 삼성 류중일 감독하고만 악수를 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꼭 삼성만 응원하겠다는 게 아니라 미리 정해진 동선상 박 대통령이 1루 덕아웃으로는 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잠실구장 중앙 출입구와 귀빈들이 빠져나가는 지점이 3루쪽과 살짝 가깝기 때문이다. 류 감독은 4차전 직전 “나와 김진욱 감독님이 미리 그라운드에 나와서 악수를 했으면 괜한 오해도 사지 않고 더 좋았을 뻔 했다”라고 웃었다.
[위에서부터 박근혜 대통령, 두산 박용만 구단주, 삼성 이재용 부회장, 박근혜 대통령과 류중일 감독.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 DB]
김진성 기자 kkoma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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