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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배우 윤여정(74)이 최근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데뷔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굴곡 많은 인생 스토리를 들려줬다.
가디언은 “윤여정은 활기차고, 재미있고, 꾸밈없고, 그리고 요리를 그렇게 잘하지는 못한다고 인정한다”면서 “74세의 이 배우는 파격적인 삶과 경력을 가지고 있고, 서구에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의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1947년 개성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 남한으로 내려왔다. 1960년대 후반 어린이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TV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진행자는 청중들에게 선물을 받는 역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윤여정은 “그들은 나에게 큰 돈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그 다음주에 오디션을 통과했고, 어린이 프로그램의 주연을 맡았다. 그는 “배우가 될 계획은 없었다”고 했다.
가디언은 "그 이후는 완전히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윤여정은 1971년 TV 드라마 ‘장희빈’으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영화 제작사의 러브콜을 거절했다.
“보통은 가난한 여자가 부유한 남자를 만나고, 그 가족은 결혼을 반대하는 이야기였죠. 모두 같은 내용이었요. 아주 지루했어요.”
그는 같은 해 김기영 감독을 만나 ‘화녀’를 촬영했다. 윤여정은 부유한 작곡가와 그의 임신한 아내의 하녀로 일하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간통, 강간, 낙태, 살인, 자살, 심지어 쥐잡기까지 등장하는 파격적인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계급적 분열과 가부장적 전통을 묵직하게 다뤘다.
가디언은 “김기영 감독은 루이스 부뉴엘, 사무엘 풀러, 오시마 나기사, 로저 코먼 등과 비교되는 한국 영화의 대도발자였다”면서 “그의 작품은 에로틱한 것, 무시무시한 것, 그리고 끔찍한 것 위주로 다루어졌지만, 종종 사회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거리낌 없이 열정적이고 솔직했던 윤여정은 새로운 유형의 독립적인 한국 여성을 구현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 사회는 남성 위주였고, 특히 영화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윤여정은 “나는 한국 미의 기준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어 “여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예쁘고, 매우 예뻐야 했다. 그들(제작자들)은 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는 좋은 의미에서 매우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여정은 1974년 인기가수 조영남과 결혼했다. 그는 “조영남은 나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플로리다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조영남은 신학을 공부했고, 윤여정은 두 아들을 키우며 전업 엄마가 되기 위해 연기 경력을 포기했다.
“교회 신자는 2,000명이었어요. 동양인은 나와 남편뿐이었죠.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지역사회는 저희를 환영하고 도움을 주었고,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어요.”
이들은 1987년 이혼했다. 이혼 여성이라는 오명은 제작자들이 윤여정에게 작품을 주는 것을 망설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어떤 역할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냥 일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16년 ‘죽여주는 여자’에서 나이든 매춘부 역을 맡았다. 그는 이러한 역할을 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내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니까요.”
한류열풍과 관련, 그는 "한국에서 좋은 영화는 항상 있었다. 세계가 지금에서야 주목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윤여정은 최근 애플 TV ‘파친코’를 촬영했다. ‘미나리’ 정이삭 감독과 또 다른 영화를 하고 싶어하지만, 미국에서는 아직 “적당한 것이 없다”고 전했다.
“난 모험을 좋아해요. 매우 용감하거나 무식한거죠. 그러나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사진 = AFP/BB NEWS]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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