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신양란의 좌충우돌 해외여행 4] 눈 쌓인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서
[여행작가 신양란] 2018년 7월에 출간된 <가고 싶다, 모스크바>를 집필할 때의 일이다.
2017년 여름에 일주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며 나름대로 꼼꼼히 자료 수집을 한다고 했지만, 막상 원고를 쓰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아쉬웠던 곳이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였는데, 처음에 갔을 때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수도원에 딸린 묘지는 대강 보고 말았다.
우리나라 공동묘지는 이름에 ‘공원’이라는 말을 집어넣어도 공원 분위기가 나지 않는데 반해, 유럽 공동묘지 중에는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는데도 공원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공동묘지라기보다는 조각공원 같은 느낌을 주는 곳도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묘지(티흐빈 묘지)가 그러했고,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 또한 그러했다.
하여간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를 설렁설렁 보고 왔는데, 알고 보니 거기에는 안톤 체호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니콜라이 고골,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등 예술가가 다수 묻혀 있다 또 정치 관련 인물로 보리스 옐친, 흐루시초프, 스탈린의 부인, 고르바초프의 부인 등도 묻혀 있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가고 싶다, 모스크바>에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 설명을 넣고 싶은데, 자료 사진이 영 신통찮았다.
그래서 2018년 3월에 다시 모스크바엘 가게 되었고,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서 반드시 사진 찍어야 하는 인물들의 무덤 목록도 챙겨 갔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결의를 다지며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 안으로 들어선 나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는 그만 “아이쿠, 맙소사!”란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전날 저녁부터 내린 눈이 쌓여 묘지가 온통 눈의 왕국으로 변해 있었다. 시내 도로는 어느 정도 제설 작업이 되어 있어서 심각함을 못 느꼈는데, 3월에 이 정도의 폭설이라니 과연 러시아다운 날씨였다.
책에 넣을 주요 인물 묘비 사진을 찍겠다고 멀리 모스크바까지 날아갔는데, 묘비 사진은 고사하고 찾으려 하는 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참으로 난감하고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모스크바가 가까운 곳이라야 “안 되겠다. 눈 녹으면 다시 와야겠다.” 하고 포기하지.
그렇게 한참 동안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누구의 묘를 찾느냐고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우리가 특별한 목적을 갖고 그곳을 찾은 것으로 보였던가 보다.
우리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가워서 적어간 목록을 보여주며 “혹시 이 사람들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휘적휘적 걸어갔고, 우리는 그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그가 알려주는 묘비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은 원래 묘비가 어떤 형상인지 짐작할 수 없는 두루뭉술한 ‘눈 쌓인 물체’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한참 동안 그의 안내를 받으며 묘지 사진을 찍고 나니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이 사람에게 따로 사례를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점이었다.
만약 선의로 안내를 해준 거라면(혹은 자원봉사자라면) 몇 푼 돈으로 사례하려는 게 무례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고맙다는 인사말로 끝내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일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매끄럽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내심 고민했는데, 그 사람이 그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돈을 달라는 의사 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얼마를 주면 되느냐고 물으니 300루블, 우리 돈으로 5,000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했다. 그보다 더 달라고 해도 줄 의사가 있는데(아니, 도움을 받았으니 줄 수밖에 없는데), 300루블이면 생각보다 적은 돈이었다.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관람객에게 묘지를 안내하며 식사 비용 정도를 버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여간 그날 우리는 그 사람 안내 덕분에 눈밭을 헤집고 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묘비 형체가 불분명한 게 많아 <가고 싶다, 모스크바> 최종 원고에서는 부득이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를 뺄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일이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여행작가 신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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