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반
[교사 김혜인] 식기세척기에서 머그잔을 꺼내다 아차 싶었다. 머그잔 그림이 탈색된 옷처럼 바래져 있었다. 식기세척기 고온에 손상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부주의함에 망연자실했다.
10년이 더 된 컵인데, 이걸 다시 구할 수 있을까. 흐릿해진 그림을 아쉽게 바라보며 기억에 남아 있는 잔상이라도 훑어보았다. 집 다섯 채와 나무 몇 그루로 이루어진 그림은 샌프란시스코의 명소 페인티드 레이디스(Painted Ladies)를 연상시키면서도, 그보다 짙고 차분한 색채와 독특한 창문 디자인이 매력적이었다.
이 그림은 2014년도에 만난 자폐증 아이 작품이었다.
내가 일하는 학교에 이 아이가 입학했을 때 많은 교사가 난감함을 느꼈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교사가 없는, 일반계 고등학교였다. 아이들 대부분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그런 곳에서 자폐증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국어 수업 시간에 그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수업 중에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지만 불쑥 웃거나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마도 학교에서 생활하는 동안 금지되고 제지받는 일만 많았겠다. 내가 수업 내용 관련해서 그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한 번은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치자마자 아이가 교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다짜고짜 “애들이 저보고 거북이래요!” 하면서 울었다.
아이가 유독 토끼를 좋아하는 걸 미리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세한 정황은 다시 파악할 일이었지만, 종이와 펜을 주며 “그럼 여기에 토끼를 그려 보자” 하고 달랬다. 아이가 능숙한 솜씨로 단숨에 토끼를 그렸다. “이제 네가 토끼야.” 하고 말해주자 눈물을 그친 아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쌩 나갔다.
아이는 그림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그때 이미 대학 교수가 이끄는 기관에서 그림을 배우며 그 작품을 활용한 디자인 상품을 제작했다. 그 그림으로 디자인한 머그잔을 받았을 때 너무 놀라워서 머그잔을 돌리며 오랫동안 관찰했다.
가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느 날 시험을 치르는데 아이가 “나는 몰라요! 나도 쓰고 싶어요!” 하고 소리치며 다른 아이 답안을 보려고 했다.
같은 반 아이들은 평소 배려심이 깊었지만 시험 기간에는 잔뜩 예민해진 상태라 모두 눈을 찌푸렸다. 아이는 그간 시험을 치를 때 정답을 쓸 수 없었고, 그래서 늘 낮은 점수를 받는 상황이 힘든 듯했다.
나는 그 부모가 왜 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 학교에서 굳이 이런 스트레스를 겪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 편협한지, 내 아이가 자폐증 진단을 받고 나서야 그 부모의 고민과 눈물과 인내와 용기를 감히 더듬어 본다.
다음 해에 나는 다른 학교로 전근했다. 그 후로 7개월쯤 지났을 때 그 학교 선생님이 내게 연락했다. 그 아이가 갑자기 교무실로 들어와서 “김혜인 선생님 다른 학교로 가셨어요”라고 말했다면서.
그렇다고 그 아이가 나를 유달리 그리워한 건 아니었겠다 싶다. 내 아이도 간혹 몇 달 전 일을 기억해서 불쑥 말하기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그 아이가 각별히 그리워졌다. 그도 어느덧 서른을 바라볼 나이가 되었겠다.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싶었다. 작가와 팬으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오래전 토끼와 집과 나무가 있는 당신의 세상이 참으로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곳에서 당신과 내가, 나와 내 아이가 편안히 쉴 수 있겠다고.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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