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종합
교토대생의 교토이야기(1) 범상치 않은 카페 강렬한 첫 만남
대학에 갓 입학해 어리버리한 유학생 티를 풀풀 풍기고 다니던 작년 4월의 일이다. 새로운 곳에서 시작된 유학생활로 마음은 온통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열기구처럼 부풀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학교 주변의 낯선 골목길 사이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신기하던 때였다. 늘어선 간판을 하나하나 읽어보며 “혼고 술가게, 이노다 닭꼬치, 에비스야, 저건 또……" 하고 다니다 보면 어느새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있었고, 노을 지는 카모가와(鴨川)를 건너 집으로 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교토대학 후문이 인접한 햐쿠만벤(百万遍) 교차로는 여러 카페와 식당이 밀집한데다 전철역도 근처에 있어 밤낮으로 사람들과 자전거로 붐비는 곳이다. 무엇보다 만국공통 대학가 불변의 법칙은 '값싸고 양 많은' 음식이 아니었던가. 선배들의 귀띔으로 알게 된 가격도 양도 '착한 가게'들이 하나 둘 늘어가던 중, "커피가 맛있는데다 가격도 착하다는" 카페를 한곳 소개받았다.
햐쿠만벤의 서쪽, 그물처럼 나있는 골목길 사이를 몇 번 꺾어 들어가다 보면, 주택가 사이에 서 있는 2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기자기한 화분이 처마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사이엔 빨강, 초록바탕의 입간판이 서 있다. "ZACO SOUL BAR". 건물 맨 꼭대기의"ZACO"라는 빛 바랜 페인트 글씨는 애써 무표정한 콘크리트 벽을 가리고 서 있다.
"짤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방울소리가 울렸다.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가게 안은 세월이 느껴지는 테이블과 의자들로 차 있었고, 벽을 메우고 있는 흑인 뮤지션들의 사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재즈 레코드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혼자 밥을 먹던 한국인 선배를 우연히 만나 잠시 동석을 했다.
"이 카페 아저씨 한국 드라마 무지 좋아하셔. 한국어도 조금 공부하시고. 잘 얘기해봐, 재밌을거야."
식사를 마친 선배는 먼저 자리를 떴고, 나가는 길에 주인아저씨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혼자 남았다. 연세가 지긋하신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작은 주방 안에서 몇 마디 소곤소곤 나누시더니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잠깐 이쪽으로 와봐요."
2인용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는 주방에서 가까운 쪽, 여섯 명은 거뜬히 앉을 만한 큰 사각형 테이블의 한 구석에 앉았고 아저씨, 아주머니도 자리를 잡으셨다.
"이름이 뭐야?"
"아, 김태범... 입니다."
그러자 주방아저씨가 주방 한 켠에 놓여 있는 책꽂이에서 주섬주섬 펜과 종이를 가져오신다.
"저기 이름 좀 한글이랑 한자로, 좀 써줘."
"아, 네……"
나는 또박또박 내 이름 석 자를 한글과 한자로 두 번씩 쓰고, 한자의 마지막 글자 범은 일본에서 잘 쓰지 않는 한자라고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주인아저씨는 안경 너머로 한글로 쓴 이름을 느릿느릿하게, 하지만 또박또박 읽으시더니 이윽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일본엔 언제,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지금은 교토에서 어디에 사는지, 혼자 살면서 밥은 직접 해 먹는지, 일본 음식은 입에 잘 맞는지, 한국에서 출신지는 어디인지, 나의 고향인 청주는 서울에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청주의 특산품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강도 높은 조사(?)를 하셨다. 특히 나의 출신지인 청주 이야기를 할 때 깜짝 놀랐다.
나의 출신지인 청주는 외국인들에게 그리 잘 알려진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에서 내 소개를 할 때마다 "출신지는 청주인데, 서울에서 남쪽으로 버스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이라는 설명을 덧붙여 얼렁뚱땅 넘어간다. 물론 처음 몇 번은 청주에서 세계최고(最古)의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되었으며, 그 중 현존하는 단 한 권의 책이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고 열변을 토하면,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헤에~ 그래요?” 하며 되묻기에,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같은 설명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남쪽으로 한 시간 반”을 덧붙이면 대부분의 일본인은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도 않고, 또 내가 더 소개할 필요도 없는 적당한 선에서 소개가 끝난다.
하지만 아저씨께서는 “청주?” 라고 되물으시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셨다. 역시 아주머님도 모르시는 눈치였기에, 내가 다시 “남쪽으로 한 시간 반”을 덧붙이려 하려는 찰나, 주섬주섬 책꽂이에서 무언가를 가져오셨다. 내 이름을 적은 종이를 꺼내셨던 그 책꽂이었다. 그리고는 큰 테이블의 반이나 덮을 수 있는 한국 지도를 펼치셨다.
“청주가 어디야?”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낯선 땅의 어느 조그마한 카페에서,우리나라 지도를 마주하고 지도 위의 내 고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왠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짧은 인사를 하고 카페의 문을 나서서 골목길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골목길의 풍경은 어느 것 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코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나는, 마음 한 켠에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의 페달도 사뿐사뿐 가벼웠고 노을 지는 카모가와가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렇듯 강렬한 첫 만남은 여운도 짙고 길었다.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도 문득 ‘자코 아저씨도 참 특이하단 말이야’ 하고 생각이 나기도 했고,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에도 ‘잠깐 들렀다 갈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샛길로 빠져 곧 자코에 닿았다.
처음 자코에 들렀을 때,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그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우물쭈물 거리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 아저씨, 아주머니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편안하게 말을 걸어오셨다. 내가 갖고 있던 일본인에 대한 고정관념, 그러니까 일본사람들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표면적인 인간관계에 머무는 일이 많다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것은 자코의 분위기가 그렇듯이 자코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그랬다.
자코는 20년이 넘게 교토대학 옆을 지켜온 터줏대감 같은 존재다. 개업 당시는 소울, 재즈 등의 흑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다방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고, 그와 함께 교토대학 경음악 동아리의 아지트와 같은 존재로 학생들과의 교류, 이벤트 장으로도 큰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역시 비범한 자코 아저씨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긴 시간이 그대로 느껴지는 색이 바랜 벽지와 함께 자코에 대한 추억도, 사람들도, 자코역사의 한페이지를 그렇게 채워왔다.
10, 20년 전 교토에서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깊은 밤을 하얗게 새우며 이야기 꽃을 피우던 그 시절을 간직한 사람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 된 사람들도 있고, 전업 뮤지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을 다시 찾는 시간만큼은 모두 그 시간, 그 공간으로 돌아간다. 긴 시간을 담담히 지켜온 자코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먼 과거로 회향하는 문턱을 넘는다.
자코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새로 만나게 되는 자코 사람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아저씨께서는 일일이 나를 소개시켜 주시기도 하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도 덩달아 많아졌다. 멀게는 십수년이 넘는 단골손님인 원로 자코 사람들부터, 나 같은 신입 자코 사람들까지, 자코 사람들은 한 가족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여행이나 출장으로 지방에 다녀올 때마다 사람들은 작은 선물을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벚꽃이 필 때쯤엔 다같이 꽃놀이에 가서 음식도 나눠먹고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 보따리도 풀어헤친다. 몇 해 전부터는 매년 여름에 교토 아와타신사(粟田神社)에서 열리는 비어가든(야외에서 간단한 음식과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행사)에도 가기 시작해, 신사의 경내에서 맥주를 마시며 노래자랑을 보는 특별한 경험을 나누기도 한다.
자코의 두 내외분과 가까워 질 수 있었던 것은 두 분의 각별한 한국 사랑도 한 몫 했다. 지금이야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알려져 일본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는 10여 년 전 한국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던 시기에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시고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드라마의 배경과 더불어 최민수, 박상원의 연기력 등 일본 드라마에서 보지 못한 드라마의 사회의식, 작품성에 압도되어 신세계에 빠져드신 두 분께서는 한국 영화, 드라마 할 것 없이 섭렵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내가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눌 때쯤엔 벌써 두터운 층의 레퍼토리를 쌓으신 뒤였던 터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만 20편 넘게 보셨다는 것을 시작으로, 사극을 시대별로, 감독 별로 구분하시며 냉정한 평가를 내리시기에 이르렀다. 영화 역시 흥행한 작품부터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꿰차고 계시며 배우들의 특징까지도 줄줄이 읊으시는 것을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두 분께서는 근 몇 년간 철저히 한국 식단을 따르고 계신다고 한다. 김치를 매일 드시는 것은 물론, 쇠 젓가락엔 김치 국물이 배지 않는다고 하시며 수십 년간 손에 익은 나무젓가락을 치우셨다.
나베(鍋, 일본의 전골요리)를 만들 때도 고추장과 김치, 생선을 구울 때도 고추장, 심지어 반찬이 없을 때는 고추장에 밥을 비벼 드신다는 것을 듣고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는 것을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고추장에는 밥을 비비게 하는 불가항력이 있는 것인가.
고추장 식탁은 카페메뉴에도 침범했다. 매일 바뀌는 자코의 식사메뉴에는 치킨 화이트소스, 캐비지롤 등을 빵이나 밥과 함께 먹는 간단한 요리가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메뉴판에는 ‘돼지고기 고추장 풍미볶음’이란 요리가 적혀있었다. 한국인 눈으로 보기엔 틀림없는 제육볶음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엔 제육볶음을 버터 바른 빵과 함께 먹어보았다.
교토의 오래된 카페에 앉아 버터 바른 빵과 제육볶음을 함께 먹는다. 어쩐지 자코에서 나누는 이야기와 이 음식이 닮았다. 때로는 이야기의 테마가 장보고와 교토 히에이잔(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의 인연부터, 최근 화제가 된 부여의 일본인 관광객 급증까지 시공을 넘나들고, 일본에 잡혀온 조선 도공들의 이야기부터 요즘 자코 아저씨가 흠뻑 빠지신(!) 소녀시대의 일본진출까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미술과 아이돌 그룹을 넘나든다.
이렇듯 안 어울릴 듯 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그 맛과 자코만의 분위기. 세련되지는 않지만 질박한 매력으로 가득한 맛. 혼자 먹기엔 너무 아까워 지금부터 이렇게 교토이야기와 함께 교감을 나눠보려고 한다. -2부로 이어짐-
*글쓴이 김태범 씨는 현재 교토대학교에서 유학중으로, 유학생 시선으로 본 교토, 일본의 일상이야기를 주말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 기사는 JP뉴스가 제공한 것입니다. 기사의 모든 권한과 책임은 JP뉴스에 있습니다>
김하진 기자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