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노년의 사랑을 그린 강풀 원작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도무지 비판을 무력하게 만드는 '착한' 영화들이 존재한다. 그 중 '착한 척'하는 영화는 종종 관객을 현혹시키기도 한다. 반면 그러한 선함을 형식과 주제 면에서 합일시키는 영화는 드물다. 어쨌든 <그대를 사랑합니다>(17일 개봉)는 분명 착한 영화다.
"전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어요. 인간의 착함, 올바른 부분을 믿고요. 다들 생각이 다를 뿐이거든요. 세상에 틀린 생각은 없어요, 다를 뿐이지. 제가 믿기 때문에 그런 만화가 나오는 거 같아요."
<바보> 개봉 당시 만났던 웹툰 작가 강풀은 사람의 '선함'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70대 네 노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이렇듯 성선설의 신봉자인 웹툰 작가 강풀의 원작에서 출발한다. 2007년 미디어다음 연재 직후 3권의 책으로 출간, 15만부가 판매, 2007 하반기 '오늘의 우리만화'로 선정, 2008년 동명 연극은 초연 후 2010년까지 17개 도시 공연, 12만 관객 돌파. '원 소스 멀티 유즈'의 표본으로 인정받고 있는 강풀의 동명 만화가 파생시킨 기록들이다.
메가폰은 <마파도> <사랑을 놓치다>의 추창민 감독이 잡았다. 코미디와 멜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선한 정서와 캐릭터를 스크린에 펼쳐왔던 추창민 감독과 원작자 강풀의 조합은 분명 찰떡궁합처럼 보였다. "감독이 정해졌으면 끝까지 믿고 맡긴다. 동참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만화는 나의 것이지만,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는 자세를 항상 유지했었다"고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린 강풀 작가도 요즘 슬슬 좋은 반응들이 전해온다며 반색 중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여러모로 관심을 끌만한 요소를 갖췄다. 누적 조회수 3000만을 상회했던 원작의 관심을 이어갈 수 있을까? 희귀했던 <마파도>의 흥행처럼 노년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까? 또 시트콤에서 '야동 순재'로 활약했던 이순재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인가. 뚜껑을 연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이 궁금증들에 대해 일단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청춘은 70대부터라는 할아버지 김만석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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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엔 우리 나이대의 배우들이 멜로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쉽게 60세가 지나면 인생이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건 아니다. 오히려 70세부터 청춘이다. 육체는 변하지만 마음의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나가서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해야 자기 관리를 한다. 이런 노인 문제는 사회, 국가, 가정에서 해결해줘야 한다."
'소셜테이너를 만나다' 인터뷰의 한 대목이 아니다. 노년층 문제 관련 기자회견 장에서나 나올 법한 이 발언의 주인공은 올해로 77세가 된 배우 이순재다. 주로 아버지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던 이 노배우가 내놓은 멜로 연기에 대한 우문현답이 실로 남우주연상 감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이순재는 청춘배우 못지않은 이성과 감성을 자랑하며 가슴 절절한 사랑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 낸다.
그가 연기한 김만석은 고물 오토바이로 우유를 배달하며 온 동네 사람들을 깨우고 다니는 꼬장꼬장한 성격의 평범한 70대다. 그런 그가 매일 새벽, 동네 어귀에서 마주쳤던 송씨(윤소정)를 만나면서 삶의 변화가 찾아온다. 파지를 주우며 홀로 근근이 생활해오던 송씨 또한 불운했던 자신의 생에서 유일하게 갖지 못했던 행복이란 감정을, 자신을 이뿐이란 이름으로 불러주는 김만석과의 교류를 통해 느끼게 된다. 만석씨는 그렇게 송이뿐씨는 그렇게 목하 열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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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사랑과 전쟁' 류의 현실적인 관계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 무뚝뚝한 만석씨와 글을 모르는 이뿐씨는 직접적인 표현대신 편지를 주고받고,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아내를 위해 '당신' 대신 '그대'란 표현을 쓸 만큼 수줍다. 그 이후 둘은 동네 주차장을 관리하는 장군봉(송재호)과 치매에 걸린 그의 아내(김수미)와 친구가 된다. 자식들이 떠나 버린 이 부부는 한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로맨틱한 커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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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김만석을 중심에 두고 장군봉의 시점과 상황을 교차시키며, 그들의 선한 감정과 인연을 따라가는 원작의 결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자극적인 화면이나 감각적인 대사에 기댈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인물들의 희망을 보여주는 판타지 장면이 오히려 촌스러울 정도다. 그렇게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원작자 강풀이 길어놓은 네 사람의 감정만 곧이곧대로 쫓는다. 그런대도 영화는 생기로 가득 차 있다.
그건 캐릭터 자체의 정서가 지닌 깊이와 설득력 때문일 터다. 만석씨가 설레는 감정을 무뚝뚝함으로 에둘러 표현할 때, 기구한 삶을 살아온 이뿐씨가 뒤늦게 찾아 온 사랑에 미소 짓는 순간, 그리고 이 시대 노년의 아버지, 어머니상을 대변하는 장군봉씨 부부의 눈물 나는 사연이 밝혀지는 후반부는 남녀노소 누구나 공감할 만큼의 정서적 휘발성을 지녔다. 더불어 젊은 층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만석씨의 손녀 연아(송지효) 캐릭터 또한 할아버지의 로맨스의 관찰자이자 매개자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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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폄하도 있을 법하다. 특별한 재해석 없이 원작에서 곁가지만을 쳐낸 구성은 일정정도 야박한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작의 정서와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집중력있게 재구성하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임을 이미 강풀의 웹툰을 영화화한 전작들이 입증한 바 있다.
강풀의 원작에 숨을 불어넣은 이순재의 '까칠' 연기
2006년 약 50만 명을 동원한 <아파트>를 시작으로 2008년 <바보>, <순정만화>까지. 세 편 모두 강풀 원작이라는 프리미엄에도 100만의 벽을 넘기지 못했다. 각각 공포영화로 인정받던 <핸드폰> 안병기, 멜로와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동감>의 김정권, <꽃피는 봄이오면>의 류장하 감독이 연출하고, 고소영, 차태현, 하지원, 유지태 등 스타배우들이 포진했음에도 결과는 손익분기점이 아쉬운 성적이었다.
"제 만화가 짧아 보여도 제대로 보면 4시간이 넘어간대요. 결국은 축약과 어떤 부분을 부각 시키느냐의 문제인데. 짜임새가 좀 있다 보니 어느 하나를 빼면 무너지는 경향이 있나 봐요. 감독님이나 시나리오 작가 분들이 열심히 썼으니까 믿고 맡기는 거죠."(강풀)
"줄거리는 만화에서 가져오고 캐릭터는 보강하는데 많이 애를 썼다"는 추창민 감독은 작가적 야심을 쉬이 내비치지 않는다. 최초 기획 당시 1년 간 표류했고 개봉까지 3년이 걸린 만큼, 김만석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감정을 관객들이 편안히 따라잡도록 배려하고 있다. 조연으로 몇 장면에 등장하는 오달수, 이문식의 코믹 연기도 감정선을 헤칠 만큼은 아니다.
그러한 구조를 완성하는 일등 공신은 극 중심에 버티고 선 노배우 이순재다. '까도남' 말고 "그냥 까칠한 남자라고 해달라"는 그는 그러나 <시크릿 가든> '김주원' 현빈을 능가할 만큼 무심한 듯 섬세한 연애 감정을 무리 없이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게 강풀 원작이 완성한 심리 묘사에 빚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대발이 아버지'와 '야동순재'를 연상시키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낸 이 노배우의 '까칠한' 만석씨는 분명 찬사를 받을 만하다.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은 건 물론 이순재 뿐만이 아니다. <도망자: 플랜 B>의 악역보다는 역시나 순한 역할에 적역인 송재호, <올가미>의 악독한 시어머니로 기억되는 윤소정, <마파도>에서의 애드립을 누르고 눌렀다는 김수미, 심지어 요즘 예능으로 더욱 더 친숙한 송지효 조차도 극 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장점은 분명 배우 보는 맛이 넘쳐난다는 데 있다.
현실 속 노년의 사랑까지 염두에 뒀다면
일반적으로 딱딱한 분위기의 기자 시사와 달리, 지난 7일 있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일반 시사는 웃음과 눈물이 넘쳐났다. 그러한 분위기를 주도한 건 시트콤과 드라마로 친숙한 이순재와 배우들의 배우들의 인지도가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순재는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남아 있다. 우리 영화는 그걸 말하고 있다. 나이를 먹어도 사랑의 정서는 남아 있고 오히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며 노년의 사랑이라는 이 영화의 본질을 재차 강조한 바 있다.
아쉬운 건 그래서다.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걸 강풀 원작에서는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승화시킨다. 반면 추창민 감독은 오히려 후반부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는 장면에서도 극단적인 신파로 빠지며 감정을 착취하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만남과 사랑, 이별이라는 정석적인 수순을 밟는 김만석 커플의 마지막 순간에까지 좀 더 노년의 일상을 담아봤으면 어땠을까. 둘의 사랑을 어떻게든 끝끝내 완성시키려는 결말을 고집하기보다 원작에는 없는 소소하고 현실적인 일상을 보탰다면 말이다. 그랬다면 노년의 삶과 사랑에 대해 좀 더 폭넓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멜로 영화라는 장르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둬 버리며 스스로를 한계 짓는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명제가 죽음에 더 가까운 노년의 사랑에 대입되는 순간, 영화는 현실 속 노년층의 사랑과 연애에 눈 감아 버리는 판타지로 봉합되어 버린다.
그건 손녀인 연아를 제외하고 김만석의 연애와 사랑을 자식 부부가 알지도, 관여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이 세상 자식들이 대개 그러하지 않느냐는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제시하는 결말의 판타지는 마치 현실 속 노부모들의 재혼을 원치 않는 자식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영화의 해피엔딩을 그저 행복하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하성태 (woodyh)
문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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