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기고: 요시자와 히로히사(吉澤公寿)
마리 로랑생 뮤지엄(Musée Marie Laurencin) 관장
지난 1956년 6월 8일 일요일 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은 심부전에 의해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여성 예술가였던 마리 로랑생은 죽기 며칠 전까지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내게 그림에 대한 재능이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노트에 적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 전까지 예술가로 살았던 마리 로랑생의 최후였다.
"나를 열광 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영원히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작가가 남긴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넘은 시절 여성으로서 화가가 되어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작가가 예술에 바쳤던 열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한국에는 천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마리 로랑생은 프랑스는 물론 일본에서 큰 사랑을 받는 작가이다. 프랑스 작가 중 유일하게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에 '뮤제'(Musee)라는 정부 공식 인증을 받은 미술관 즉 '뮤제 마리로랑생'이 존재한다. 일찍이 마리 로랑생이 생존했던 193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마리 로랑생에 대한 연구 및 콜렉션의 열기가 뜨거웠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그 생애가 소설 '무지개 위의 춤'과 연극 작품으로도 소개됐다.
일본에서 마리 로랑생의 작품 세계는 이미 192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리 로랑생이 독일인 남작 오토 폰 뷔체(Otto Christian Heinrich von Watjen 1881-1942)와 결혼 한 뒤 스페인에 머물던 시절인 1915년 일본 시인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와 만나게 된 것이 인연이었다.
호리구치 다이가쿠는 1925년 마리 로랑생이 쓴 시 4편이 포함된 프랑스 번역 시집을 간행하고 이후 소설가 시와노 히사오가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의 사랑을 그린 소설 '무지개 위의 춤'을 간행했다. 일본인들의 이 같은 뜨거운 마리 로랑생에 대한 사랑은 1983년 마리의 생애 100년을 기념하여 나가노현 타테시나에서 '마리 로랑생 미술관'(Musee Marie Laurencin)이 문을 여는 결실로 이어졌다.
일본에서 마리 로랑생의 작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데 반해서 프랑스에서는 당대 최고였던 화가 마리 로랑생의 명성이 작가 사후 수십 년간 퇴조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마리 로랑생의 작품이 지닌 여성성과 큐비즘이나 야수파 등의 특정 미술 사조에 편입되지 않았던 점, 작가가 점차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고립된 채 수십 년을 지냈던 것 등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작가의 사망 60주기를 맞아 프랑스 파리 마르모탄 뮤지엄에서 열린 마리 로랑생 회고전에는 25만 명이 넘는 파리지앵들이 몰려들어 작가의 작품 세계가 21세기 다시금 새롭게 각인 되는 기회가 마련됐다.
이처럼 21세기 들어 '잊혀진 여인'이었던 마리 로랑생이 새롭게 주목을 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작가 특유의 황홀한 색채미(色彩美)와 사물의 윤곽을 모호하게 그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기법을 들 수 있다. 세계 미술사에서 마크 샤갈과 더불어 색채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마리 로랑생은 핑크와 옅은 블루, 그리고 청록색, 우수가 감도는 회색 등을 사용해 100년 전 그린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아울러 마리 로랑생은 20세기 초반 예술 사조를 이끌었던 관념적인 주지주의를 거부하고 특유의 직관과 본능을 표출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아름답고 젊은 여성들과 형체가 모호한 동물들이 풀밭에 들어찬 몽환적인 세계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끊임없이 담아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의 환상과 직관을 갖지 못했다면, 마리 로랑생은 입체파나 다다이즘의 추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조지스 블라크, 앙리 루소 등 야수파와 큐비즘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이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낸 여성 화가라는 점에서 마리 로랑생이 서양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적지 않다. 마리 로랑생은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바라봤던 서양 미술사의 흐름에서 탈피해 여자가 눈으로 응시한 여성의 모습과 여성성을 포착해낸 최초의 여성 화가라고도 할 수 있다.
[사진 = 가우디움 어소시에이츠 제공 - 마리 로랑생 33세 무렵, 마드리드에서, 1916년]
심민현 기자 smerge14@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