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은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이 그랬듯, 역사적 사실들과 그럴듯한 허구들을 적절히 결합해 요리해낸 팩션(Faction=Fact+Fiction)성 휴먼 드라마다. 1979년의 이른바 ‘10·26 사태’와 그 사태가 발발하기 이전 40일 간의 드라마틱한 사건·사연들을 극화했다. 그 극화의 토대는 가천대 교수로 재직 중인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동명 논픽션. “한국중앙정보부(KCIA)의 부장(부총리급)들과 이들이 주도한 공작정치를 소재로 한국정치의 이면을 파헤친 정사(正史)”다. 1992년 출간 후 52만 부 팔려나갔고 2012년 개정 증보판(화보 30페이지 삽입) 이후로도 7쇄(2020년 1월 20일 기준)까지 판을 거듭한 베스트셀러다. 장장 18년간의 ‘사진적’ 기록인 그 원작의 극히 일부를 감독과 이지민 작가('천문: 하늘에 묻는다', '밀정')가 함께 더러는 충실하게, 더러는 느슨하며 자유롭게 ‘풍경화적’으로 각색해 빚어냈다.
느슨함, 자유로움은 우선 캐릭터의 이름들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대통령은 ‘프레지던트 박’이나 ‘각하’ 등으로 불릴 뿐, 단 한 번도 직접 호명되지 않는다. 영화의 다른 주·조연들인 김재규는 김규평(이병헌 분)으로, 김형욱은 박용각(곽도원)으로, 차지절은 곽상천(이희준)으로, 그리고 전두환은 전두혁(서현우)으로 등장한다. 영화가 시종 실존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환기시키고 지시하기에, 이러한 개명이 적잖이 어색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 속으로의 몰입을 방해한다고 할까.
그럼에도 그런 ‘이름바꿈’이 필요했을 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영화적 장치랄까. ‘노무현 스토리’가 명백하거늘 '변호인'(2013, 양우석)이 송우석(송강호)이란 이름을 내세웠듯. 그 덕분에 영화는 일련의 비판적 거리감이나 일반적 개연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당시 중정 부장이던 김재규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 후 18년 동안이나 장기 독재를 자행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최후의 순간까지 김재규와 박통을 향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는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대사건, 즉 ‘10·26 사태’에 대해 아는 바 거의 없을 우리네 어린 관객들이나 외국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극적 보편성이 가능해지지 않았는가. 그 덕에 초두효과를 무색케 하며 '그때 그 사람들'이 90만도 채 동원하지 못한데 반해, 440만(이상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참고)이 넘는 ‘중박’을 터뜨릴 수 있지 않았겠는가.
자유로운 각색의 정점은 공식 역사에서는 미해결 사건으로 머물러 있는 ‘김형욱 실종’을 김규평과 곽상천 사이의 충성 경쟁의 결과, 김규평의 지시로 박용각을 살해한다는 극적 설정이다. 그로써 영화는 허구적 성격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원작자, 유족은 물론 사실 위주로 영화를 감상하는 적잖은 이들을 당혹시키면서. 제목도 그렇거니와 이러저런 허구성들은 '남산의 부장들'을 ‘김재규 드라마’로 한정시켜 관람해서는 안 된다는 작의(作意)를 함축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그렇게 독해·수용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제8대 부장이었다는 김재규가 ‘10·26 사태’을 일으킨 으뜸 주역인데다, 그 역을 바야흐로 경쟁을 허용치 않고 있는 대세 중 대세 이병헌이 연기하고 있지 않은가. 의도 여부를 떠나, '남산의 부장들'은 김규평/김재규 캐릭터와 톱스타 배우 이병헌에 초점을 맞춰 볼 경우 영화의 재미가 강화·배가된다.
매체 시사 때는 플롯의 호흡이나 미장센 중심으로 영화를 읽고 봤다. '남산의 부장들'은 '내부자들'(2015)보다는 '마약왕'(2018)에 가까웠다. 실망스러웠다. 서둘러 리뷰를 쓰지 않은 주된 이유다. 하지만 성격화(Characterization)와 연기들은 단연 주목할 만했다. 일반 상영관에서 꼼꼼히 다시 보니, 더 그랬다. 상기 주·조연들의 연기들은 예외 없이 합격점을 줄만했다. 이병헌을 비롯해 다들 명불허전이었다. 특히 이성민의 박통 싱크로율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헤미안 랩소디'(2018)의 라미 말렉(프레디 머큐리)에 비견될 만했다.
성격화들도 일품이다. 상대적으로 단선적인 다른 캐릭터들과는 달리 복합적·입체적인 김규평 캐릭터는 압도적이다. 김재규의 현현 아닐까, 싶은 추측마저 인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를 보고 나 구입해 읽어본 원작이나,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 내외와 조카의 인터뷰 등을 참고하니 내 추측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 2020년 1월호 인터뷰에 서 김충식 교수는 이병헌에게 “김재규는 사무라이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던 데다 차지철이라는 후배에 밀리는 것에 대한 반감, 그가 공판정에서 증언한 대로 유혈사태를 막기 위한 국가에 대한 나름의 충정까지도 뒤섞여 있었다는 걸 얘기해줬”다는데, 영화는 원작자의 조언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나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국정원(국가정보원)으로 ‘거듭’(?)나는 중정의 악명·악행을 수도 없이 들으며 살아온 세대다. 제 아무리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다 한들 중정 수장을 했던 이를 미화·영웅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거사 덕택에 대한민국 현대사가 어떤 (선한) 전환점을 맞았다는 사실에는 수긍하지 않을 길 없다. 비록 거악(박정희)에 이어 또 다른 거악(전두환)이 출현해, 못잖은 군사 독재를 지속시키기는 했지만.
김재규 그는 내게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현대사의 문제적인, 너무나도 문제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돼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그 문제적 인물에 대한 문제적 팩션 영화로 손색없다. 원작에도 나와 있듯, “김재규의 시해사건은 계획적이라고 보기엔 너무 엉터리고 우발적이라고 보기엔 너무 치밀”했다. 연관해 사건 후 남산으로 갈지 육군본부로 갈지 잠시 고민했던 승용차를 공중에서 보여주는 이미지와, 거사 전 부산에서의 시위를 김재규의 시선으로 헬리콥터에서 바라보는 이미지의 여운·의미는 한 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곽명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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