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교사 김혜인] 이상하게 낮부터 졸음이 쏟아지며 눈을 반쯤 뜨고 있는 것만도 벅찬 날이었다.
아이와 집에 돌아오니 저녁 7시. 가방을 정리하고 아이와 놀아주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금세 8시가 되었다.
10분만 누워 있고 싶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오늘은 혼자 아이를 씻겨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 퇴근이 늦어질 때면 나 혼자서 아이를 씻겼지만 요즘은 늘 둘이 함께 했다. 두어 번 내가 저녁에 외출했을 때 남편이 혼자 아이를 씻긴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집에 있을 때 남편 혼자 아이를 씻기는 게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남편만 욕실 안에서 준비하고 나는 들어가지 않고 서 있자 아이가 욕실에 들어가기부터 거부했다. 들어간 후에는 아이가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인내심 있게 아이를 다독였다.
차라리 내가 눈에 안 보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방에 들어가 누웠다.
까짓거 잠깐 힘을 더 내서 아이를 함께 씻기면 10분도 채 안 걸릴 일이었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울며 떼쓰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학습되지 않도록. 언젠가는 같은 성별의 아빠랑만 씻어야 하므로. 아이가 지닌 강박과 루틴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서.
욕실은 아이에게 위험한 공간이다. 분명히 남편이 아이를 잘 잡고 있을 텐데 욕실에서 연신 우당탕 소리가 났다. 아이가 어지간히 발버둥을 치나 보다. ‘그래도 30분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가 있는데 아빠랑만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저항하고 또 저항했다. 30분, 1시간, 1시간 반...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씻기를 마치고 나오자 큰 수건에 폭 감싸 안긴 아이는 아주 깨끗해 보였다. 반면에 남편은 온몸이 땀과 물로 얼룩진 상태였다.
나는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아이가 다시 한 번 크게 울었다. 너는 왜 이렇게 인생을 힘들게 사는 걸까. 아빠랑만 목욕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아빠랑만도 목욕할 수 있는 거야.”
아이를 보며 말하다가 1시간 반 동안 참았던 눈물이 터지며 나도 대성통곡했다. 남편이 내게 아이 앞에서 울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했지만, 이내 그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내가 주양육자인 사실을 감안해도 아이는 나 외에 누구에게 잘 안기지 않고 다른 사람 스킨십을 싫어한다. 심지어 아빠라 할지라도.
그래, 어린이집에서도 오직 담임 선생님만 아이 기저귀를 갈아줄 수 있다지. 다른 선생님들이 아이를 예뻐해도 고개를 휙 돌리며 좀처럼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로맨스 웹소설 남자 주인공이 떠올랐다. 까다로운 성미에 타인의 스킨십을 극도로 싫어한다. 오직 여자 주인공만이 균열을 일으켜서 그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이야기다.
아이가 아직 많이 어리긴 하지만 잘생겼다는 소리도 제법 듣는다. 엄마와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에게만 마음을 주는 걸 보니 순정파인 듯하다. 아이는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처럼 살고 있구나. 장난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자라면서 아이 성격이 다듬어지겠지만, 타고난 기질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변화도 두려워하는 내 아이에게 마음의 균열을 일으키는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이와 사랑하면 해피엔딩일 테니.
아, 그런데 로맨스 웹소설 남자 주인공은 다 재벌집 아들이지. 역시 현실은 녹록지 않구나.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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