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윤욱재 기자] '스나이퍼' 장성호는 1996년 KIA의 전신인 해태에 입단해 간판 스타로 활약하다 2010년 트레이드로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한화는 지난해 최하위로 추락했고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며 새 출발에 나섰다. 김 감독은 해태 시절 장성호를 주전 선수로 키운 '은인'이지만 장성호를 트레이드 카드로 내세웠다. 아직 프로 데뷔도 하지 않은 신인 투수 송창현과 맞트레이드된 장성호는 롯데에 새 둥지를 틀었다.
장성호가 트레이드된 이유 중 하나는 김태균, 김태완 등과 포지션이 중복되기 때문. 교통 정리에 나서는 한편 젊은 선수들 위주로 팀 개편에 착수하게 된 한화다.
장성호는 지난 시즌 한화 유니폼을 입고 '금자탑'을 쌓았다. 바로 개인 통산 2000안타가 그것. 장성호의 2000안타는 역대 3번째이자 최연소 기록으로 남았다.
역대 최초로 2000안타에 도달한 선수는 양준혁(전 삼성)이었다. 그 다음 주인공은 전준호(전 히어로즈)였다.
세 선수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좌타자인 것은 물론 트레이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양준혁은 1993년 삼성에 입단해 '괴물 신인'으로 불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거듭나던 양준혁은 1998시즌이 끝나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바로 해태로의 트레이드가 그것이었다. 현대가 아낌 없는 투자로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란 결실을 맺자 삼성도 부랴부랴 투수력 보강에 나섰다. 해태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영입하기 위한 대가로 양준혁을 내줬다. 양준혁의 공백은 쌍방울로부터 영입한 김기태로 채웠다.
양준혁은 트레이드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해태에 입단했고 단 한 시즌만 뛴 뒤 2000년 LG로 트레이드됐다. 2년 사이에 트레이드를 두 차례 경험한 양준혁은 2001시즌 타격왕을 차지했고 FA를 선언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해태에서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아 '푸른 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전준호 역시 트레이드를 피하지 못했다. 1991년 롯데에서 데뷔한 전준호는 1993년 75도루를 기록하는 등 부동의 리드오프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롯데는 1997시즌을 앞두고 현대와 맞교환을 통해 전준호를 떠나 보냈다. 롯데는 대형 신인 투수 문동환을 확보하고 떠오르는 신예 김대익이 전준호의 공백을 메워줄 것으로 기대했다.
어찌 보면 양준혁의 트레이드와도 맞닿아 있다. 현대는 전준호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전력 보강에 아낌 없는 투자를 하며 막강한 전력을 뽐냈다. 그 결과 1998년 인천 프랜차이즈 사상 첫 우승이란 결실을 맺었고 이것은 곧 '재계 라이벌' 삼성의 승부욕을 일깨웠다.
세 선수의 트레이드 속에는 '투수력 보강'이란 지상 과제가 함께 하고 있다. 삼성은 '고질병'으로 지적된 투수력 보강을 위해 양준혁을 포기해야 했으며 롯데 역시 우수한 투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장성호는 KIA에서 한화로 갈 당시 포지션 중복에 따른 교통 정리가 어려워진 끝에 트레이드된 케이스였지만 롯데로 건너갈 때는 유망주 투수를 데려오기 위한 수단이 됐다.
하지만 그만큼 트레이드 가치가 있는 선수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양준혁은 해태에서 LG로 트레이드되면서 LG의 좌타 라인을 더욱 공고히 했고 전준호는 현대의 1번타자로 활약하며 전력의 퍼즐을 맞춰 현대가 명문으로 거듭나는데 일조했다. 장성호 역시 한화의 타선 보강을 위해 간택 받았으며 지난 시즌 후에는 홍성흔, 김주찬 등 타선에 공백이 생긴 롯데가 군침을 흘렸다.
양준혁은 물론 전준호도 그랬고 장성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유니폼을 바꿔 입은 다음에야 2000안타를 달성했다. 공교롭게도 트레이드 경력이 있는 것은 그만큼 리그를 대표하는 우수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장성호(위 사진)와 양준혁.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DB]
윤욱재 기자 wj3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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