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김나라 기자]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 '인천상륙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활약상일 것이다. 하지만 스크린으로 옮겨진 '인천상륙작전'의 러닝타임 111분을 채우는 건, 또 다른 영웅들이었다. 그 성공 이면에 가려진 한국인들의 숭고한 희생이다.
사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첫 출발점도 크게 새로울 건 없었다.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대표는 최근 마이데일리에 "학도병 이야기를 담은 영화 '포화속으로' 이후, 진짜 군인 이야기를 영화화하고 싶었다"며 "그 중에서도 이기는 전쟁을 다루고 싶었는데,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이 떠올랐다. 이를 심층적으로 조사하면서 X-RAY 작전 등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들을 접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발판이 된 X-RAY 작전과 팔미도 작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를 수행한 해군 첩보부대를 비롯해 켈로부대의 실제 활약상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가미했다.
정태원 대표는 "당시 작정 중 전사한 故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 그분들을 떠올리면서 작품을 제작했지만, 극 중 X-RAY 작전의 첩보 상황은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 첩보작전이기 때문에 결과만 알려져 있지, 그 과정까지 알아내는데 한계가 있었다"며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의 모습은 실제와 가깝고,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장면은 다큐멘터리를 참고해 똑같이 재연했다"고 말했다.
영화는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을 모티브로 한 해군 첩보부대 대위 장학수(이정재)가 8명의 부대원들과 목숨을 걸고 X-RAY 작전을 수행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여기에 북한군 인천 방어사령관 림계진(이범수)과의 팽팽한 대립, 인천 시립병원 간호사 한채선(진세연)과의 멜로 에피소드가 더해졌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는 어땠을까?
◆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7만 5,000명의 연합군과 261척의 함정이 투입된 대규모 작전이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수도 서울하고 근접한 인천을 점령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심리적 타격감을 안길 것을 노렸다. 그러나 성공확률은 5,000대 1. 인천은 좁은 수로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시간이 제한적이었다. 단 2시간만 가능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인 장사상륙작전과 X-RAY 작전,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 등을 꾸몄다. 이는 학도병들과 군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X-RAY 작전
맥아더 장군은 1950년 7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인천의 지형과 적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을 요청했다. 한국어와 지리조차 모르는 미군 첩보부대를 투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
그 결과 17명의 해군 특수첩보대가 탄생됐다. 영화에선 8명으로 각색됐다. 당시 해군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은 자신을 포함 임병래, 김순기, 장정택 중위 등 정보장교와 김남규, 정성원, 박원풍, 차성환, 한유만, 홍시욱 등 정보국 소속 사병 6명, 7명의 민간인으로 첩보부대를 꾸렸다.
이들은 8월 20일 첩보활동을 개시했다. 인천 영흥도를 거점으로 서울, 수원 등지까지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일명 X-RAY 작전. 항공 사진 촬영, 북한군의 인천지역 병력 규모, 기뢰 위치 및 제거, 상륙 지점 지형 등을 탐지했다. 이 정보들은 미극동군사령부에 송신돼 인천상륙작전의 세부계획을 수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개시가 임박함에 따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첩보활동을 뒤늦게 알아차린 북한군 1개 대대가 14일 영흥도를 기습했다. 영흥도에는 뒷처리를 위해 남은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 6명의 대원과 해군 의용대원들이 있었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나머지 대원들을 마지막 보트로 탈출시키고, 북한군의 포로가 될 위기에 직면했다.
두 사람은 포로가 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누설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 기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뒤 권총으로 자결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와 다른 결말을 전개했다. 정태원 대표는 "결말을 두고 오랜 회의를 거듭했다. 똑같이 간다면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져 결국 방향을 달리 했는데 힘든 결정이었다"며 "사실 이정재는 역사와 같은 결말을 원했었다"고 털어놨다.
# 팔미도 작전
영화는 북파 공작 첩보업무를 수행하는 한미 특공대 '켈로 부대'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정식 명칭은 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국내외 곳곳에서 비밀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화 말미에 그려지는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이다.
당시 특공대는 한국인 3명과 미국인 3명, 총 6명으로 구성됐다. 미 해군 첩보대대 유진 F. 클라크 해군 대위가 총책을 맡았으며, 클라크혼 육군 소령, 존 포스터 육군중위와 한국인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한국 켈로 부대 최규봉 대장이었다. 영화에선 서진철 역의 정준호가 켈로 부대를 이끄는 설정이다.
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인천만 전체 주변 해상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켈로 부대원들에겐 "9월 15일 0시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들은 이 곳을 점령한 북한군을 제거한 끝에 불을 밝혔고, 이 불빛을 신호로 연합함대 261척은 상륙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 장사상륙작전
장사상륙작전은 영화에선 다뤄지지 않았지만,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토대를 마련한 맥아더 장군의 양동작전이다. 인천 상륙을 하루 앞두고 북한군의 경계를 분산하기 위해 극비로 수립, 작전명 174호라는 기만작전을 꾸몄다.
이 작전에 투입된 대부분은 학도병이었다. 참전병 772명 중 600여명이 10대 학도병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불과 보름 남짓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다. 9월 13일 부산항에서 모여 문산호에 탑승, 14일 새벽 장사해안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문산호는 좌초됐고, 학도병 60여 명이 전투 직전 숨졌다. 그럼에도 상륙 작전을 감행, 장사도 남쪽 고지를 탈취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 교두보를 확보하는 등 북한군을 동해안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총 772명 중 139명이 전사했고 92명 부상자 발생, 이외에 대부분이 실종되는 등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사진 = CJ엔터테인먼트, 마이데일리DB, KBS 1TV·EBS 1TV 방송화면 캡처]
김나라 기자 kimcountry@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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