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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대의 음악노트]
음악이 꼭 사회 현실을 반영할 의무는 없지만, 그런 음악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사실이다.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감당하고 있는 현실을 음악에 담을 때, 그 음악은 담론이 되고 연대가 된다. 사르트르를 끌어온다면 대략 ‘참여음악’이라 불러도 좋겠다. 그런 참여음악엔 불가피하게 비판 정신이 가미되게 마련이고, 비판은 다시 분노와 저항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이 땅은 지금, 꽤 어수선하다.
미씽 루씰은 그런 뜻에서 ‘참여음악’을 하는 밴드로 보인다. 앨리스 인 체인스와 사운드가든을 반씩 섞은 헤비 스토너록과 눅진한 블루스록으로 그들이 쏟아내는 텍스트는 그러나 온통 절망에 찬 한숨들 뿐이다. 예외는 없다. 대신, 이들은 거칠고 몽롱한(psychedelic) 록 사운드로 그 절망의 껍질을 깨부술 기세다.
날카롭고 짙은 강우석의 기타 톤, ‘rat in the cage’에서 그루브 바람을, ‘The crown is not for you’에선 추락의 회오리를 일으키는 최기봉의 베이스, 그리고 ‘no shelter’로 증명한 조창기(드럼)의 리듬감. 폭발하는 연주력으로 그 기세는 꺾일 기미 따윈 보이지 않는다. 되레 더 조이고 태워서 이 던적스러운 현실을 뚫고 나가려 한다. 음악을 부릴 줄 알고 음악의 힘을 아는 팀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미씽 루씰의 음악은 90년대 얼터너티브록과 70년대 하드록의 조화다. 클랩튼(Eric Clapton)의 크림(Cream)처럼 트리오 라인업으로 엮은 이 환상의 시대 배합이 절망의 시대 과제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 이 모습이 앨범 ‘Life under the surface’에는 담겨 있다. 혹자는 ‘2010년대의 노이즈가든’이라 부르거나 동시대의 언체인드와 비교했지만, 불필요한 비교다. 저들은 미씽 루씰의 레퍼런스가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같은 뿌리에서 자란 줄기요 열매에 더 가깝다. 누가 먼저 뻗어 나왔고 누가 먼저 맺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연주와 메시지가 똑같이 인상적인 '늦은' 데뷔작. 강력한 ‘올해의 (록)앨범’ 후보다.
[사진제공=(주)디지탈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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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약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웹진 음악취향Y, 뮤직매터스 필진
대중음악지 <파라노이드> 필진
네이버뮤직 ‘이주의 발견(국내)’ 필진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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