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봉준호(51) 감독이 마침내 영화 산업의 심장부, 미국 아카데미(오스카)에 깃발을 꽂았다. 영화 '기생충'이 2020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영화상(외국어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하며 2관왕 쾌거를 누렸다. 본상 노미네이트도 최초, 국제영화상 수상도 최초, 각본상도 최초. 걷는 길마다 최초다.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의 돌비 극장(Dolby Theatre)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은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 101년사에 새로운 전설로 남았다.
이날 한진원 작가와 함께 무대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각본상 수상 직후 "큰 영광이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이다. 국가를 대표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건 아닌데, 이 상은 한국이 받은 최초의 오스카 상"이라며 "언제나 많은 영감을 주는 내 아내에게 감사하고, 나의 대사를 멋지게 화면에 옮겨주고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멋진 '기생충' 배우들에게도 감사드린다"고 뜻 깊은 소감을 전했다.
한진원 작가는 봉준호 감독과 어머니에게 감사를 전한 뒤 "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듯이 한국엔 충무로가 있다. 저의 심장인 충무로, 모든 필름메이커들과 스토리텔러들과 함께 이 영광을 나누고 싶다. 땡큐 아카데미!"라고 외쳐 박수를 받았다.
세계가 매료된 건 '기생충'뿐만이 아니다. 세계의 시선이 봉준호로 향한다. 특히 유머와 칼날이 동시에 배어있는 봉준호 감독의 촌철살인 화법은 전 세계 영화 팬들과 언론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오스카 캠페인'에서 그의 말을 현지 정서와 맥락에 맞게 전달하고 있는 통역사 샤론 최(최성재)까지 스타덤에 오르며 봉준호 파급력을 실감케 하고 있다.
◇ "오스카는 '로컬' 영화제"
시작은 오스카의 허를 찌른 발언이다. 지난해 10월 '기생충'의 북미 개봉을 앞두고 가진 미국 매체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음에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 것 같냐'라는 질문을 받자 "이상하긴 하지만 큰일은 아니다. 오스카는 국제영화제가 아니라 그저 '로컬(지역)'영화제이기 때문"이라는 뼈 있는 농담을 날렸다.
유색인종을 배척하고 백인, 남성, 자국 영화 등을 중심으로 트로피를 전달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오스카를 꼬집은 것이다. '그들만의 잔치'임을 공감했던 세계 영화 팬들은 열렬하게 환호했다.
◇ "1인치 자막의 장벽만 뛰어넘어라"
봉준호 감독은 외국어 자막 읽기를 기피하는 일부 영화인들을 대상으로도 일침을 날렸다. '로컬영화제' 발언의 연장선이다. 실제로 미국의 영화 평론가 윌 마비티는 자신의 트위터에 "미국의 아카데미 회원 중 최소 17명이 자막을 꺼려해 오스카 작품상 후보인 '기생충'을 안 봤다"라고 적으며 보수적인 일부의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달 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베벌리힐튼호텔에서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직후 그는 "나는 외국어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 통역이 함께하겠다. 이해 부탁드린다"며 "자막의 장벽, 장벽도 아니다.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놀라운 영화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고 말해 통쾌함을 안겼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언어는 영화(I think we use only one language, Cinema)"라고 덧붙였다. 획기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입담은 자리에 앉아있던 영화인들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 "지금이 '인셉션'처럼 느껴진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달 13일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후보로 오른 후 미국 매체 데드라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이 '인셉션'처럼 느껴진다. 나는 곧 깨어나서 이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재치 있는 소감을 밝혀 웃음을 안겼다.
또 그는 "여전히 '기생충' 촬영 현장에 있고, 모든 것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다. 밥차가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울부짖겠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훌륭하고 너무 행복하다"라고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자랑했다.
◇ "BTS의 파워, 나의 3000배를 넘는다"
한국 문화가 가진 경쟁력과 이에 대한 자긍심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위트가 넘쳤다. 골든글로브 시상식 레드카펫 행사에서 캐나다 매체 CTV와 인터뷰를 가진 봉준호 감독은 '한국이 독창성을 선도하고 있는 가운데, 기분이 어떤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제가 지금 골든글로브에 있긴 하지만 BTS(방탄소년단)가 누리는 파워는 저의 3000배는 넘는다. 한국은 그런 멋진 아티스트들이 많은 나올 수밖에 없는 나라인 것 같다"고 치켜세웠다.
◇ "뉴욕에서 본 쥐, 행운의 상징이 된 것 같아"
'기생충'은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서부 샌타모니카에서 개최된 제35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Film Independent Spirit Awards, FISA)에서 '인비저블 라이프'(브라질), '레미제라블'(프랑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프랑스), '레타블로'(페루), '더 수브니어'(영국)를 제치고 최고의 국제 영화상(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마더'(2009)로도 노미네이트 된 적 있는 봉준호 감독은 수상 트로피까지 거머쥐게 됐다.
이날 봉준호 감독은 "뉴욕의 오래된 영화관에서 처음 GV를 할 때 쥐를 봤다. 되게 오래된 극장이었다. 제가 답을 하는데 쥐가 한 마리가 관객들 뒤로 가더라.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행운의 상징이 된 것 같다. 쓸데없는 소리다"라고 익살스러운 말을 덧붙여 폭소를 더하기도 했다.
◇ "영화감독을 꿈꿨던 어리숙한 12살 소년"
연신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국가, 심리적인 장벽을 깨부순 봉준호 감독은 명백한 '영화광'이다. '기생충'으로 지난해 제72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그는 "언제나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영감을 받았다"며 "영화감독을 꿈꾸던 소심하고 어리숙한 12살 소년이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만지게 되다니. 이 트로피를 만지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라고 벅찬 감격을 드러내면서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사진 = AFPNEWS]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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