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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양유진 기자] 폭발, 해일, 침수 따위의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를 떠올려 보라. 내용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 등장인물이 예상치 못한 날벼락을 마주하고 살아남으려 분투하는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기존과 전혀 궤를 달리한다. 재난 자체보다는 재난에 대응하는 복잡한 인간 군상을 입체적으로 부각해 차별화를 꾀한다.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대지진 후 '우리 아파트 하나만 살아남는다면?'이란 물음표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재난을 초반부에 더없이 짤막이 배치한다. 곧이어 아파트 주민의 태도나 행동을 비추고 점점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줘 '만약 내가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어떠한 선택을 할지' 지속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지진으로 하루아침에 황폐해진 한겨울의 서울, '황궁 아파트'만이 형태를 보존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까스로 생존한 219명의 아파트 주민은 수많은 외부인이 보금자리로 몰리자 위협을 느끼고 한데 뭉친다. 이들은 '아파트는 주민의 것. 주민만이 살 수 있다', '주민은 의무를 다 하되 배급은 기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한다' 같은 수칙을 세워 일거리를 배분하고 생필품을 나눠 가진다.
병든 할머니를 홀로 모시는 902호 주민 영탁(이병헌)은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하자 선뜻 나서 불길에 뛰어들어 부녀회장 금애(김선영) 눈에 든다. 그렇게 영탁은 '황궁 아파트' 주민 대표가 되어 입주민의 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먹거리가 동나기 시작하고 주민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면서 '황궁 아파트'의 분위기가 점차 어두워진다. 설상가상 옆집 주민 혜원(박지후)이 영탁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과연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매력은 위기에 처한 인물의 대처가 과연 어디까지 옳고 그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더없이 선하게만 보이다가도 음식을 구하고자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민성(박서준)을 비롯해 살기 위해 외부인을 쫓아내는 '황궁 아파트'의 여러 주민은 선악의 경계에서 점차 광기로 물들어간다.
재난 다음 벌어진 경과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지만 지진이 발생하는 순간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질 법한 일로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는 엄태화 감독은 '사실성'을 내세웠다. 제작진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황궁 아파트'의 규모감을 그대로 구현하려 실제 건설에 준할 정도의 아파트를 지어 촬영했다.
모든 배우가 주어진 역할 이상을 해내는 가운데 이병헌의 존재감이 단연 압도적이다. 영화 '백두산'(2019), '비상선언'(2022)에서 극한의 재난을 몸소 겪었던 이병헌은 전면에 서서 신들린 연기를 펼친다. 꼬질꼬질한 얼굴로 다가와 정들게 하고는 정체가 탄로 나자 180도 다른 눈빛, 표정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이 원작이다.
오는 9일 개봉. 상영 시간 130분. 15세 이상 관람가.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양유진 기자 youjinyang@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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