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명예퇴직하기 전, 나는 학생을 인솔해 해외 탐방을 여러 차례 했다. 내 자식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나니,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윗분들을 설득해 여름 방학 프로그램을 진행하곤 했다.
학생들과 함께 유럽에 갔을 때 들은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선생님, 나는 내 자식도 엄두가 안 나는데, 유럽이 어디라고 저 어린 애들을 열다섯 명씩이나 이끌고 오셨단 말입니까?”
지금 생각하니 나도 참 미쳤다 싶다. 지금이라면 윗분들이 등 떠밀어도 안 갈 텐데, 그때는 젊었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던 것 같다.
하여간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겪었던 일 중 한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2009년 8월에 일본 도쿄에 갔을 때 일이다.
도쿄 하마마츠초에 있는 치산호텔에서 묵었는데, 아침에 투어를 시작하려니 태환이가 방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방 열쇠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디 갔겠느냐. 다시 잘 찾아봐라.” 하니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거다.
할 수 없이 프론트 데스크에 가서 사정 설명을 하니 상냥한 직원이 하는 말, “1만 엔을 내셔야 합니다.” 그 당시 환율로 15만원 돈이다.
방 열쇠 잃어버린 죄로 15만 원이 날아갈 판이니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방 구석구석을 다 뒤지고, 태환이 가방이며 호주머니를 다 뒤졌다. 그런데도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쿄 탐방에 태환이 하나만 데리고 간 게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도 도쿄 여행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는데, 열쇠를 찾는다고 마냥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1만 엔을 호텔 직원에게 준 다음, 혹시라도 열쇠를 찾게 되면 그 돈을 돌려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곤 시내 투어를 위해 지하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역은 호텔에서 몇백m 즈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태환이가 이러는 거다. “아무래도 쓰레기 버릴 때 열쇠를 같이 버린 것 같아요.”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휴지통에 15만 원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이른 다음, 호텔로 달려갔다.
그런데 한참을 뛰다 보니 길이 영 낯설다. 지하철역에서 엉뚱한 출구로 나온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치산호텔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몇몇 사람은 영어를 모른다며 그냥 가버리고, 그중 한 사람이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그런데 가보니 더 낯선 동네다. 그렇게 몇 사람에게 길을 묻는 동안, 나는 치산호텔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파출소에 들어가 물으니, 한 순경이 지도를 펼쳐 놓고 뭐라고 자세히 설명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본어를 모르고, 그는 치산호텔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중엔 파출소 직원이 다 모여들어 한마디씩 거드니, 더욱 요령부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는 하마마츠초역으로 일단 간 다음, 그곳에서 다시 치산호텔 가는 길을 찾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치산호텔을 찾았다. 쏜살같이 휴지통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부지런한 직원이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깨끗이 치운 뒤였다.
아무런 소득 없이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니, 아이들은 투어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있었다. 한여름 뙤약볕 속을 뛰어다닌 나도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이러구러 하루 일정이 끝나고, 우에노 공원에서 잠시 쉴 때 일이다. 모훈이가 문득 열쇠 하나를 제 가방에서 꺼내더니 “어, 이 열쇠가 뭐지?” 했다. 알고 보니 그게 바로 태환이 열쇠였다.
왜 태환이 열쇠가 모훈이 가방 속으로 들어갔는지는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고, 아침나절 나의 생쇼만 전설이 돼버렸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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