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이처럼 사소한 것들 |저자: 클레어 키건 |역자: 홍한별 |다산책방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북에디터 한성수] 한 세대 한 명 나올 법한 작가라고 불리는 거장 눈에는 무엇이 사소할까.
이처럼 단순한 호기심에 무턱대고 책을 사서는 책장에 방치한 채 1년 넘게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일랜드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라는 묵직한 헌사 때문이다.
130쪽 남짓의 얇은 책이지만, 저자가 첫머리에 남긴 이 한마디는 이 책이 제목처럼 절대 사소하지는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주었다.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뒹굴거리며 읽고 싶었건만.
예감은 어김없었다. 어려운 표현도 없고, 이야기 구조도 단순하고,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는 이 짧은 소설을 세 번 읽었다. 아마 네 번, 다섯 번 읽어도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게 있을 테고, 그것이 이 책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이야기는 1980년대 아일랜드 작은 도시에서 아내와 다섯 딸을 키우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석탄 상인 ‘빌 펄롱’ 시선으로 전개된다. 미혼모 밑에서 주변 도움을 받으며 불우하게 자란 펄롱은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 쉽게 일어난다는 걸 잘 안다. 비록 아버지 없이 태어났을지언정 친절한 어른들의 도움으로 먹고 배울 수 있었던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세상은 여전히 혹독했지만 펄롱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납작 엎드려 지내면서 딸들을 잘 키우겠다고 결심한다. 비록 ‘어디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그런 펄롱에게 사건이 일어난다. 석탄 배달을 나간 수녀원에서 창고에 갇힌 여자아이를 발견한 것. 수녀원에서 불법적으로 벌어지는 착취 정황을 눈치챈 펄롱에게 아내를 비롯한 주변 이웃들은 일침을 가한다. 가진 것을 지키려면 무시할 것은 무시해야 한다고, 사나운 개를 옆에 두어야 순한 개가 물지 않은 법이라고.
펄롱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굳이 말하진 않겠다. 도입부만 읽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행동할지 그냥 알게 되니.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독자를 흥분시킬 반전은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읽는 내내 불안하다. 내심 ‘제발 그러지 마, 펄롱!’이라고 되뇔지도 모르겠다. 그의 결정이 여느 동화처럼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게 너무 눈에 보여서.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라고 자문하는 펄롱은 그저 행복하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본문 중에서)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라니. 책 곳곳에서 등장하는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 그래서 우리가 놓치는 것들 중 정말 아무것도 아닌 양 느껴지는 건 단 하나도 없다.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드는 건 그래서다.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아래, 알면서도 외면해온 것이 얼마나 많았나.
작년 12월에 동명 영화가 개봉됐다.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킬리언 머피가 주연과 제작을 맡았다. 소설 속 그 세밀한 내면 묘사가 영화로는 어떻게 구현됐을지 사뭇 궁금하다.
|북에디터 한성수. 내가 왜 이 일을 택했나 반평생 후회 속에 살았지만, 그래도 어느 동네서점이라도 발견하면 홀린 듯 들어가 종이 냄새 맡으며 좋다고 웃는 책쟁이.
북에디터 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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