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 사사키 아타루 |역자: 송태욱 |자음과모음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번역가 조민영] ‘뭐야, 이거 전에 읽은 책이잖아?’
얼마 전 책 한 권을 펼쳤다가 깜짝 놀랐다. 읽지 않은 책인 줄 알았는데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책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야 다반사지만, 읽은 사실조차 잊다니 이번엔 좀 심했다. 기억을 되살리려고 앞부분 몇 페이지를 훑었다. 그제야 몇 년 전 엄청 재미있게 읽은 책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말 텐데 책을 읽어 무엇하나.’ 가끔 이렇게 민망한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허탈한 생각이 든다.
그러다 최근 일본 철학자이자 작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망각 이유를 납득시켜줄 문장을 찾았다.
“문학 같은 건 함정투성이여서 멍청하게 이해하면 큰일인 작품이 많다.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읽고 감명을 받아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방어’다.”
그러면서 “책이란 다 읽으면 잊어버리고, 그래서 반복해서 읽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읽기란 우리가 미쳐버리지 않도록 무의식이 방어기제를 내세워 기억을 검열하고 억압할 정도로 엄청난 일이다.
그렇다고 읽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읽고 또 쓰는 그 한 행 한 행에 어렴풋이 자신의 생사를” 걸어야 한다.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를 변혁하는 일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사사키는 혁명은 폭력으로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게 아니라, 읽기와 쓰기 즉 문학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문학이란 소설이나 시 같은 장르뿐 아니라, 성서와 법전 등을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기법을 아우른다.
예를 들어 16세기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는 철저하게 성서를 읽고 수많은 책을 썼다.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는 교회가 따르라고 명령하는 그리스도교 세계 질서에 아무런 근거가 없을뿐더러, 그 질서가 썩어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의 결과물이 바로 루터가 1517년에 쓴 <95개조 반박문>이다.
성서를 읽는 운동에서 시작된 루터의 대혁명은 다시 법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프로테스탄트 법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배하는 교회법을 부정하고, 실정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법질서를 구상해나간다. 이렇듯 루터는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혁명이 가능함을, 텍스트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임을 보여준 언어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루터도 앞서 중세 해석자 혁명이 없었다면 대혁명의 기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2세기에 가톨릭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도 불리는 <로마법 대전>을 발견한다. 교회는 이 법전을 철저하게 읽음으로써, 종교 세계뿐 아니라 민간 사회를 재구축한다.
사사키는 이 중세 해석자 혁명이 근대법, 근대국가, 주권 개념 등 ‘근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외에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 아래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 버지니아 울프, 니체, 성 아우구스티누스, 라캉 등을 불러낸다. 이들 모두 목숨을 건 각오로 읽고 쓴 혁명가로서, 우리에게 “책 읽기는 대체 어떤 일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 제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압축돼 있다. 이 도발적인 문구는 파울 첼란의 시 ‘빛의 강박’에서 가져왔다. 기도하는 손은 복종과 체념, 구원을 기다리는 손이다. 하지만 사사키는 그런 수동적인 태도는 단호히 버리고, 책을 들고 펼쳐 읽고 또 읽으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절망의 제스처가 아니라, 세계를 바꾸기 위한 혁명의 몸짓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돌아서면 까맣게 잊더라도, 책장을 넘기는 우리 손이 언젠가 혁명의 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번역가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했다.
번역가 조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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