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거장 이만희 원작의 4번째 리메이크... 상처 어루만지는 속깊은 멜로
▲ 영화 <만추> 포스터ⓒ 보람엔터테인먼트
'현빈 앓이'가 스크린으로 번졌다.
<만추>가 개봉 첫날 전국 10만 3천 명(배급사 집계)의 관객을 동원하며, 17일 개봉작 중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결과는 여성 비율 80%, 30대 이상 여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예매율 1위를 기록할 때부터 예견됐다. 현빈의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만추>가 처음이다.
사실 이런 분위기가 가능했던 건 팔 할이 현빈 덕이다. 지난해 가을 개봉 예정이었던 <만추>는 흥행성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원 배급사가 손을 놨지만, <시크릿 가든> 효과에 힘입어 현재 배급사가 현빈의 군입대 전 개봉을 결정했다.
탕웨이가 내한했던 지난 10일 기자시사회 장에서 벌어진 소동도 현빈을 보러 온 팬들이 시사회장을 점거(?)한 덕에 일어난 유례없는 해프닝이었다. 이에 더해 "현빈 왔숑!" 멘트를 날린 탕웨이의 '센스' 덕분에 <만추>와 현빈의 인기는 더욱 화제가 됐다.
그럼에도 <만추>는 탕웨이의 영화다. "그녀의 사진을 붙여 놓고 시나리오를 작업했다"는 김태용 감독의 말마따나, 영화의 시작과 끝은 물론 주요한 이미지를 지배하는 것 모두 탕웨이의 몫이다. 그렇다고 현빈의 팬들이 아쉬워할 일은 없을 듯하다. <만추>는 생면부지의 '두 남녀'가 3일의 시간동안 강렬한 만남을 갖는 멜로 영화이기에.
마음을 여는, 그 순간에 대한 멜로 <만추>
한 여인이 한적한 주택가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어딘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미친 듯이 밟았던 길을 되돌아 뛰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지된다. 그리고 7년 후, 수인번호 2537번의 모범수가 된 중국인 애나(탕웨이)는 어머니의 부음 소식에 3일간의 특별 휴가를 나오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한국 남자 훈(현빈)을 만난다.
어머니의 재산만 관심을 두는 형제들, 남편의 살해와 엮이게 만든, 그러나 이제는 다른 이의 남자가 된 옛사랑 왕징 모두 애나를 소외시키는 사람들이다. 훈은 그런 애나에게 유일하게 순수하게 접근한 사람이다. 때로는 낯선 이의 관심이 더 반가운 법, 시애틀에 도착한 이튿날 역 앞에서 우연히 훈을 만난 애나는 도발적으로 한 마디를 건넨다.
"Do you want me?(당신, 나를 원해요?)"
여성 모범수와 낯선 남자의 짧은 만남이란 <만추>의 소재는 작가들의 창작욕을 거듭 자극해왔다. 잘 알려진 대로, <만추>는 1966년 거장 이만희 감독이 만들었고 지금은 프린트가 유실된 동명 원작의 네 번째 리메이크다. 1972년 일본에서 <약속>으로, 또 1975년 스타일리스트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에 이어, 문예파 김수용 감독이 1981년 <만추>로 거듭 재해석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로 평단의 사랑을 받았던 김태용 감독은 <만추>를 "이만희 감독님이 고독한 남녀를 그렸다면, 이번 작품은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배경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의 만남을 그렸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다고 인간이 고독이 사라질까. 그래서 김 감독은 "<만추>는 '마음을 여는 그 순간'에 대한 영화"라고도 말한다.
그래서일까? <만추>는 종종 애나를 잡은 앵글 안으로 훈이 스며드는 걸 포착한다. 그건 상처받은 여인에게 가벼운 관계를 전전하던 한 남자가 다가선다는 영화의 전체 맥락과도 맞닿아있다. 여성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돈을 버는 훈이 7년 간 마음을 닿았던 여인에게 다가서는 순간,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탕웨이의 열연이 돋보이는 애나의 심리적 변화다. <만추>는 그걸 짧지만 강렬한 '사랑'이라 부른다.
평범한 멜로를 거부하는 김태용 감독의 세심한 연출
▲ 영화 <만추>의 한 장면.ⓒ 보람엔터테인먼트
섬세하고 미세한 감정의 결을 잡아내기로 유명한 김태용 감독의 카메라는 그렇게 인물의, 특히 애나의 떨리는 감정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예컨대, 모텔 방에서 뒤엉킨 둘의 모습을 잡아낼 때도 관객이 주목하게 되는 건 스치듯 흔들리는 애나의 손길이다. 그런 애나의 감정은 여백 많고 안개 낀 시애틀의 가을 풍광과 조화를 이루며 묘한 울림을 전달한다.
언어는 중요치 않다. 영어와 중국어, 한국어가 번갈아 등장하지만, 서로의 진심을 토로할 땐 모국어가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역이 더 흥미진진하다. 애나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할 때, 훈이 그저 중국어로 '하오'(좋다)와 '화이'(안 좋다)라고 간간이 추임새를 넣을 뿐이다. 언어가 주는 거리를 애나와 훈은 마음과 마음의 진심으로 채워 넣는다. 이렇게 낯선 공간, 다른 국적의 인물로 원작을 변형한 김태용 감독의 선택은 적중한 듯 보인다.
사실 <만추>는 이야기보다 정서와 감정이 지배하는 영화다. '한 여자가 감옥에서 잠시 나와, 낯선 공간에서 한 남자를 만나고, 그와 헤어져 감옥으로 돌아갔다'가 이야기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사이 여백이다. 관심과 무시, 대화와 이해를 오고가는 자잘한 에피소드 속에 애나와 훈은 상처받고 메말랐던 영혼에 잠시나마 위안을 받는다.
특히 전작 <가족의 탄생>에서 시간의 흐름을 몽환적인 화면에 담아냈던 김태용 감동의 감성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놀이공원 장면에 반하고야 말 것이다. 범퍼카를 탔던 둘은 다툼을 벌이는 한 연인을 목격한다. 여자를 떠나려는 남자와 그를 붙잡으려는 여자. 훈이 마치 더빙을 하듯 그 남자의 심정을 읊조리자, 애나가 여자의 심리를 빌어 옛사랑에 관한 상처를 고백한다. 판타지로 묘사된 이 장면은 다소 밋밋할 수 있던 영화에 묘한 생기를 불어 넣는다.
중반부까지 정중동을 유지하던 영화는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둘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깜짝 등장한 훈은 왕징에게 자신을 애나의 애인이라 소개한다. 애나를 사이게 둔 두 남자의 쩨쩨한 자존심 대결은 결국 주먹싸움으로 번지고, 이를 말리던 애나는 결국 눈물을 쏟아 낸다. 메말랐던 애나에게 그 눈물은 그간의 심리적 억압에 카타르시스로 작용했을 터다. 관객이 십분 공감할 만한 인간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힘, <만추>가 평범한 멜로와 갈라서는 지점이다.
그리고 탕웨이, 현빈의 영화 <만추>
▲ 영화 <만추>의 한 장면.ⓒ 보람엔터테인먼트
다시금 강조하지만, <만추>는 탕웨이의 영화다. 2.35대 1인 와이드 비율로 잡은 그녀의 클로즈업은 <만추>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억누른 감정을 필두로 불안함과 간절함, 그리고 헛헛한 감정을 미세하게 표현하는 탕웨이의 얼굴은 그 자체로 이야기다. <색, 계> 후 4년, 이 국제적 여배우의 성장을 한국영화에서 확인시켜준 것만으로도 김태용 감독은 임무를 완수했을지 모른다.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건 현빈의 안정감이다. 애나가 마음을 여는 훈은 직설적이고 발랄(?)하기까지 한 성격의 소유자다. <소름> 윤종찬 감독의 <나는 행복합니다>, <낯선 하루> 이윤기 감독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등 최근 작가주의 감독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업한 현빈은 <시크릿 가든>의 팬들을 만족시킬 만큼의 안정된 연기를 펼친다.
마지막으로, 현빈 팬들이 안도할 법한 소식 하나. 원작에서 주요한 심리적 모티브가 됐다는 섹스신은 없다. 대신 한국영화 사상 가장 길다는 키스신이 기다리고 있다. 김태용 감독의 이러한 선택은 완성되지 않은 둘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과 좀 더 적합해 보인다. 라스트신,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먼 곳을 응시하는 탕웨이의 아리송한 표정만큼이나.
하성태 (woodyh)
문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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