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쿵' 하면 '짝' 하는 배우가 있다. 굳이 콕 집어 이야기 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핵심을 알고,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는 영리한 배우. 뮤지컬배우 정선아가 딱 그렇다.
정선아는 자기애와 자기객관화가 동시에 되는 배우다. 그래서 매번 인터뷰 속 이야기가 정확하고 풍성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자신감을 유지하면서 겸손함이 돋보이는 참 노련하고도 매력적인 배우다.
정선아가 2018년 처음 관객들에게 선보인 작품은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불세출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안나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시대를 관통하는 가족과 사랑 등 인류 본연의 인간성에 대한 예술적 통찰을 담아낸 작품이다.
타이틀롤 정선아가 연기하는 안나 카레니나는 완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허함과 외로움을 품고 있는 복합적인 캐릭터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위험한 사랑에 빠지며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인물이다.
"러시아 작품이란 것에 큰 메리트를 느꼈다"고 운을 뗀 정선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는 표정이었다. 처음 접해보는 러시아 작품인 만큼 내용 뿐만 아니라 작업 방식에도 새로운 것들이 많아 다시 리프레쉬 된 모습이었다.
"우리 나라에 러시아 작품이 들어왔던 적이 없잖아요. 연출님이 러시아 분이고 예술의 나라에서 오신 분들과 같이 그 작품을 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도 많았고, 호기심도 꽤 컸죠. 공연을 올리고 보니 그 전에 했던 것과는 또 다른 특별함이 있고 음악이 상당히 강하면서 그 음악 속에 드라마도 진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선아에게 '안나 카레니나'는 확실히 새로웠다. 몰아치는 드라마는 쉴 틈을 주지 않았고, 가창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연기적인 집중도, 정신적으로는 훨씬 더 편한 느낌을 줬다.
알리나 체비크 연출과의 작업도 새로웠다. "연출님이 상당히 강한 신여성"이라고 입을 연 정선아는 "'러시아 분들은 다 이렇게 강하시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갖고 있는 생각들이 상당히 확고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출님은 러시아 작품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고 나라가 다르기 때문에 충돌도 조금 있었어요. 이해가 안 되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해주긴 하지만 뭐랄까.. 지금까지 했던 작품 연출님들과는 너무 달라서 연습을 하면서 싸우기도 했고 울기도 했죠. 너무 다르니까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 될까' 싶었어요."
정선아와 알리나 체비크 연출은 연습 기간 동안 치열했다. 작품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같은 작품을 놓고 같은 메시지를 향해 달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연출과 배우의 입장은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정선아는 그렇게 성장했다.
"공연을 올리고 나니 운동할 때 모래주머니를 달고 러닝머신을 뛰다가 공연 올라간 순간에 그 모래주머니가 다 없어져서 훨훨 나는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할 정도다.
그는 "음악이 굵직굵직한데 큰 연습실에서 다 진성으로 파워풀하게 연습해야 했고, 런도 일찍 돌았다"며 "부분 부분 배우들마다 연습해서 합치는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모두 함께 모여 하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왜 이렇게 연습을 효율적이지 않게 하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되게 신기한 경험이었죠. 연습 때도 매번 육체적으로 다 쏟아내는 걸 원하시더라고요. 그게 계속 되다보니 몸도 많이 힘들고 목에 무리가 갈 것 같아 힘들었죠. 쉬는 것 없이 거침없이 강하게 했어요. 정말 제 인생에 이번 작품, 이런 경험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이전에 내가 나약하고 해이해진 부분이 있다면 그걸 다시 잡는 계기가 됐죠."
정선아는 '누가 이기나 보자'라는 마음으로 달려 들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서로 다른 방식을 맞춰 나갔다. "'누가 이기나 보자, 난 절대 질 수 없어' 하면서 했는데 공연을 올리고 보니 그 긴 여정이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더라. 너무 편안하게 날아다니는 기분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아이러니 해요. 제3자로 봤을 때 어렵고 엄청난 체력도 요하고 목소리 관리도 잘 해야 하고 음이 높은데 그게 자연스럽게, 정말 내가 안나가 돼서 너무 편하게 부담스러운 것 없이 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가보지 않았던 또 다른 길을 가게 하고, 예전에 갔었지만 나이가 먹으면서 좀 더 편하게 가고 싶어하고 좀 더 지름길로 돌아가려고 했던 생각을 지우게 해줬어요. 한단계 한단계 그 어떤 요행도 없이 밟아 무대에서 관객을 만났죠."
정선아는 알리나 체비크 연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난 태어날 때부터 받은 게 많은 사람이긴 한데 사람이 항상 노력을 하고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또 한 번 나이 35세에 알게 됐다"며 "이 좋은 때, 이 때 쯤 해이해질 수 있고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쯤 이렇게 좋은 연출가를 만났다. 내게 새로움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결과는 그 친구를 당할 수 없다"며 웃은 정선아는 "나도 거침없는데 그냥 '네' 했다. 당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사실 의구심도 들었고 '이거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도 하면서 펑펑 울었어요. 얘기하다 말이 안 통해서 운 건 처음이었어요. 다 쏟아붓는데도 거침 없으니 힘들더라고요. 근데 연습 스타일이 맞고 안 맞고는 없는 것 같아요. 배우는 주어진 것 안에서 해내야 되는 거고 이런 저런 불평을 늘어 놓는다면 투덜이에 불과해요. 이런 과정들이 배우에겐 큰 수확이라는 걸 느꼈어요."
알리나 체비크 연출 역시 그런 정선아를 높이 샀다. '지금 너무 잘하고 있고 너를 보면서 안나가 표현이 되는 것 때문에 그 어떤 순간도 쉬지 않고 안나로 살아 있어 줬으면 좋겟다'고 했다.
"정말 바보처럼 두 번 울었어요. 근데 막상 공연 올리니 이렇게 안 떨린적은 처음이에요. 준비가 너무 돼있으니까요. 잘 하고 있든 못 하고 있든 내 스스로 무대 위에서 관객을 만날 준비가 돼있는 거예요. 진심도 진심이거니와 몸이 기억하는 좋은 연기법을 제게 주셨어요. 제 나름대로 많은 걸 배운 것 같고 좀 더 깊숙해진 제가 된 것 같아요. 좀 더 단단해지고 어떤 문제든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나만의 해결 방법이 생긴 것 같아요. 또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조금 더 열린 것 같아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아요."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공연시간 150분. 오는 2월 25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MD인터뷰②]에 계속
[뮤지컬배우 정선아. 사진 = 김성진 기자 ksjksj0829@mydaily.co.kr]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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