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 여동은 기자] 영어 단어 ‘Nation'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국가(國家) 또는 국민(國民)그리고 민족(民族)이다.
따라서 단일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은 일반적으로는, 동일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 풍습,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을 갖는 인간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나라를 형성하는 예가 그리 많지 않다. 역사적으로 봐도 제국주의가 대세였을때 강대국들이 다른 민족을 침범해 영토를 합병하거나 한 사례가 많다. 결국 서로 다른 민족이 동일한 영토(또는 국경)안에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언어, 종교, 문화적 차이 등으로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가장 좋은 사례는 하나의 단일 민족이 국경으로 획정되어진 영토안에서 같은 언어, 문화, 종교, 신화 등을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사례처럼 강대국에 의한 전쟁 등으로 인해 타민족에 지배를 당한 경우도 많다.
오랜 기간 동안 타민족에 의해 지배를 받다가 다시 같은 민족과 합치게 될 경우에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타민족에 의한 지배로 인해 종교가 달라졌거나, 문화적 차이가 생겼을 경우 오로지 같은 민족이라고 해도 수월하게 융화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언어가 말살되는 경우도 있다.
민족 차별은 감정적 또는 선입견 등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합리적 사고에 기준한 이성(理性)이 파고 들 여지가 없다. 배타적인 극단적 민족주의는 거의 종교처럼 맹신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민족에 대해서는 객관적 기준과 주관적 기준의 양면에서 정의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객관적으로는 동일한 명칭이나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고 공통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나 공통의 역사적 기억을 갖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어떤 특정의 영역에서 자신들을 결합하여 연대감을 갖는 존재라고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소련 해체 이전의 러시아의 학자는 '언어, 지역, 경제생활 및 문화의 공통성 속에 나타난 심리상태, 공통성을 기초로 발생된 것의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견고한 공동체이다’라고 하는 스탈린의 정의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에 집단적 귀속의식, 풍습의 전통, 문화, 기원, 해방투쟁의 공통성 등의 다양성을 가미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정의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민족의 분포가 국민국가와 중복되는 경우 일견 영토가 민족의 정체성을 낳는 지표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인과관계는 오히려 반대인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의 지역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집합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 토지가 특정의 민족에 의해 점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지역의 공통성은 민족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이 된 사람들이 그 지역에 집주(集住)한 결과에 불과하다.
많은 민족은 공통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어(母語)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공통성이 있다고 하여 동일한 민족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언어를 일상회화나 행정문서에 이용하는 사람들의 분포는 반드시 민족 확산의 경계와는 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민족이 사용하는 공통어를 다른 민족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민족이란 역사의 전통이나 문화의 공통성을 기초로 만들어진 공통체라는 정의도 애매하고 동의(同義) 반복에 불과 하다. 이것은 공통성의 특징을 어느 정도 엄밀하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공유하는 문화가 그것을 낳은 아랍인이라는 민족의 범위를 상당히 초월하여 확대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 기준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타자와 다르다’는 '우리들 의식’이나 '우리들로의 귀속의식’을 낳는 연대감이다. 이 ‘우리들 의식’을 갖는 집단의 틀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족이 발생하거나 종래 실재한 '우리들 의식’을 갖는 집단이 다른 민족에 포함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많이 관찰되어 왔다. 이 주관적 기준과 객관적 기준은 오히려 서로 불가분(不可分)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은 동일 현상의 양 측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족이라는 의식은 《자생적ㆍ문화적》인 힘이 서로 길항(拮抗)하는 다이내믹한 작용과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국민국가의 틀에 반발하여 문화적인 정체성을 주장한 것이 에스닉 집단이다. 에스닉 집단과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민족과의 차이는 《작위적ㆍ정치적》인 힘을 목표로 하는 내용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아무튼 기존의 동일한 집단에서 태어나 개인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없도록 양육된 틀의 총체, 즉 풍토, 생활조건, 사회ㆍ가족제도, 인간관계의 방향, 언어, 종교신앙, 의식주의 관행 등의 총체가 《공속(共屬)감각》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좋다. 이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는 감각은 자생적이고 규모도 작다. 유아기의 예의범절이나 학교교육 등에서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배우면서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온 요소는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민족으로의 《공속 의식》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원동력의 하나인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독립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큰 방향을 만들어내는 요인이다.
한편, 《작위적ㆍ정치적》인 힘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요소가 시간을 거치는 동안에 《자생적ㆍ문화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그것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속 감각》을 강화하는 경우도 있다. 민족문제는 정치나 경제의 불평등, 문화적인 차별이나 편견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집단이《민족의식》을 형성하면서 반발하는 것에서 발생된다. 집단간의 대립에 직면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이 더욱 의식화되어 대립의 축이 과장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중국의 원나라의 사회와 민족 차별
원의 중국 통일은 민족의 융합을 촉진시켰다. 즉, 황하 유역으로 진입한 거란족과 여진족은 오랜 기간 한족과 접촉하면서 이미 한족과 별 차이가 없게 되어 한인(漢人)이라고 불렀다. 또, 일부 이슬람 교를 믿고 있는 페르시아 인들과 아라비아 인들이 중국에 와 일정한 지역에서 정착하여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한족, 몽골족, 위구르족 등과 오랜 기간 잡거하면서 서로 혼인하고 왕래하여 새로운 민족인 회족(回族)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앙 아시아 인들을 색목인(色目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몽골 통치자를 보좌하여 지배 민족이 되었다.
원은 몽골 귀족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민족 분화 정책과 동시에 몽골족 제일주의, 민족 차별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전국의 각 민족을 4등분 하여, 제1계급은 국족(國族)인 몽골인, 제2계급은 색목인, 제3계급은 한인, 제4계급은 남인, 즉 남송인이었다. 인구를 4계급별로 보면 제1~2계급은 4~5만 호로 전 인구의 3%에 불과하였지만, 제3계급인 한인은 200만 호로 15%, 제4계급은 1000만 호로 82%였다.
이 밖에 구구(驅口)라는 특수한 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전쟁의 포로이거나 범법자들로 노예와 같이 대대로 소나 말처럼 취급당하였다. 그리고 상도(上都)나 대도와 같은 큰 도시에는 구구 매매 시장이 있었다. 쿠빌라이 시대에 어떤 몽골인들은 구구로 전락, 외국으로 팔려 나갔으며, 회회민도 구구로 전락한 사람이 있었다. 민족 차별은 관리의 임명에서부터 시작하여 형벌, 과거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났다.
우선 관리는 몽골인이 독점, 색목인이 몽골족을 보좌하는 지배 계급이 되었다. 색목인은 특히 재정과 경제 분야를 맡았고, 심지어 몽골의 황실이나 개인적 사업도 위탁을 받아 관리하였다. 중앙관이나 지방관의 경우 한인과 남인은 정관(正官)이 아닌 부관(副官)으로만 임명되었다. 그리고 지방에는 다루가치를 몽골인이나 색목인으로 임명하여 감독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과거 제도가 실시되었는데, 고시 과목도 다르고 발표도 몽골인은 오른쪽을 높게 보아 몽골인과 색목인은 우방(右榜)에, 한인과 남인은 좌방(左榜)에 발표를 하였으며, 합격자도 몽골인은 6품관, 한인과 남인은 한 등급 아래인 7품관을 주었다. 그러므로 한족의 지주나 지식인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일이 어려웠으므로 사회적으로 독서인들을 무시하는 풍조가 일어나, 직업을 1관(官), 2리(吏), 3승(僧), 4도(道, 도교의 도사), 5의(醫), 6공(工, 장호), 7렵(獵, 수렵인), 8민(民), 9유(儒), 10개(丐, 거지)로 나누어 구유십개(九儒十丐)라는 말도 있다.
범법자의 경우도 몽골인과 색목인은 종정부(宗正府)에서, 한인과 남인은 형부에서 맡았다. 특히, 한인과 남인은 사냥과 무예 연습이 금지되고, 집회와 결사도 금지당하였으며, 한자(漢子)와 만자(蠻子)로 불려 천시당했다. 이처럼 원의 민족 차별 정책과 경제적 수탈은 한인들의 불만을 가져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종교적으로 민심을 유혹한 것이 백련교(白蓮敎)였다. 한산동(韓山童)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한 것이라며 무리를 모아들였다. 이 때, 유복통(劉福通)이 그 무리들을 모아 기병하려고 하였는데, 사전에 누설되어 한산동이 체포되어 죽었다. 유복통은 그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앞세워 1351년에 영주(潁州, 안휘 부양현)에서 기병하였는데, 이들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있어 홍건적(紅巾賊)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난을 '백련교도의 난' 또는 '홍건적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원의 멸망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밖에도 장강 하류와 절강 지구에서 장사성(張士誠)과 방국진(方國珍), 장강 중부 지역에서 서수휘(徐壽輝), 장강 상류에서 명옥진(明玉珍)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게르만족)이 유대인을 학살 한 이유
근대에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명은 그 지역과 다른 지역과의 차이를 하늘과 땅의 그것으로 만들었다. 적자생존이라는 과학사상 그러니 열등한 민족은 생존의 의의가 없다는 사상이 게르만족의 사회를 풍미했다. 게르만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지도자들이 그 사상의 신봉자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나라가 해외 식민지를 바탕으로 유지하는 관계로 여타 민족의 말살 정책을 펼칠 수가 없었지만 독일의 지도자들은 그러하지 않은 관계로 그 정책을 펼칠 수가 있었다. 이들로서는 지도자 자리를 유지하려면 전국민의 소망인 여타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쳐야만 했다.
1930년 경제대공황이 일어났다. 해외식민지가 없는 독일이 그 난관을 극복하려면 동유럽을 점령하고 그곳의 슬라브족을 추방하거나 노예로 만들거나 죽이거나 하여만 했다. 현대사회에서 추방하거나 노예로 만들면 후환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모조리 죽여야만 했다. 독일 국민이, 국내의 유대인과 집시들을 말살시키고 동유럽의 슬라브족을 모두 죽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국민이 원한다고 지도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그 일에 나서지 않자 국민이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이런 때에 ‘히틀러’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밤마다 시민들을 모아놓고, “국내의 유대인과 집시를 말살시키고 동유럽을 점령하고 그곳의 슬라브족들을 추방시키거나 죽여야 한다.”고 연설했다.
히틀러는 집안도, 학력도 보잘것없는 사나이였다.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고 사교성도 없고 한 마디로 열등한 인간이었다. 유유상종 그런 사람들이 모여 정치 그룹 그러니 나치당을 만들었다. 히틀러가 그들 가운데 연설 재주가 좀 있어, 정치 집회 때 연설하는 일을 맡았다. 그의 연설은 대성공이었다. 이에 히틀러가 나치당의 수령 자리에 올라갔다. 나치당이 독일 최고의 당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 그러니 괴링, 헤스, 히믈로, 괴벨스, 룀 모두가 열등한 인간들이었다. 괴벨스는 머리도 좋고 많이 배웠으나 절음발이인 관계로 정신적으로도 불구자가 된 사람이었다. 절음발이라고 모두 정신적 불구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괴벨스만은 불구자가 되어버렸다.
국내 최고의 당인 된 나치당이 그 지도자들이 열등한 인간들인 관계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아챈 독일 사회의 엘리트들이 나치당을 내세우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다. 나치당의 지도자들이 비록 재주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수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휘하에 들어왔으므로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는데도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 게다가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는 관계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의 무능함을 알아채고 안심한 군부, 관료, 경제, 문화 파워엘리트들이 나치당에게 전권을 장악하게 해주었다.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손안에 들어왔는데도 능력이 없는 인물들인 히틀러, 괴벨스, 괴링, 히믈러는 자신들이 아무것도 못하고 파워엘리트들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룀만은 지적으로는 모자라도 조직에 대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히틀러 그룹이 그를 내세우면 파워엘리트들을 견제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모자라는 인간들인 그 그룹이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아옹다옹만 했다. 파워엘리트들이 그것을 이용해서 룀을 처치했다. 이제는 히틀러 그룹이 그들의 손안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었다.
세계대전 속으로
동유럽을 점령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총통 자리에 오른 히틀러가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폴란드를 공격, 점령해야만 했다. 그러나 군부가 폴란드를 공격하면 영국, 프랑스가, 체결한 조약에 따라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할 것이므로 주저주저했다. 국민의 열망을 외면할 수가 없는 군부가 마지못해 폴란드를 공격했다.
독일 국민은 같은 게르만 국가인 프랑스, 영국과는 절대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쳐들어오려고 하니 맞서 싸울 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일 장성들은, 독일이 프랑스,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 결국은 패하고 만다며 꽁무니를 뺐다. 그러나 군복을 벗지 않으려면 돌아서야만 했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전격작전을 펼치면 초반에는 승리할 것이었다. 그 작전은 나중 일을 생각해서 히틀러 개인의 작전으로 여겨지게 만들어 놓아야만 했다.
히틀러는 상등병 출신으로 군사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상등병 출신 중에도 필자처럼 그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사람은 백만 명에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히틀러는 그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군사적 무능을 알고 있는 군부 엘리트들이 세 가지 작전을 올려 히틀러에게 그 가운데 한 가지를 고르게 했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히틀러가 작전을 입안하고 집행한 것으로 알게 되었다. 초반에는 그에게 올린 세 가지 작전이 모두 합당한 것이라 히틀러가 군사적 천재가 되었다. 나중에는 모두 부당한 것이라 그의 작전마다 실패하게 되었다.
독일군이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실시한 전격작전이 성공을 거둬 영국군을 유럽대륙에서 몰아내고 프랑스한테는 항복을 받았다. 독일 국민은 영국, 프랑스를 점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군이, 됭케르크로 물러난 영국군을 바다 속으로 쓸어 넣을 수가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자기 나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었다. 항복한 프랑스에게는 그 남부와 해외 식민지를 보전하게 해주었다. 독일 국민의 소망은 게르만족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과는 화친하고 슬라브족 국가인 동유럽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영국 국민은 독일 국민의 그 소망을 알았다. 전쟁을 두려워한 영국 국민들은 독일과 화친하기를 원했다. 이런 때에 ‘처칠’이란 이름의 정신병자가 나서 독일과 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양심적인 의학자들은 히틀러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한 그들도 처칠만은 정신병자였다고 말한다. 온건파와 과격파가 싸우면 과격파가 이긴다. 처칠의 경경파가 승리하여 영국이 독일과 싸우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 간에 공중전이 벌어졌는데 이 싸움에서 독일이 완패했다. 영국 공군이 독일 전역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독일 국민도 영국과의 전쟁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국과 독일 간에 장기전이 벌어지면 해외 식민지가 있는 영국은 버틸 수가 있지만, 없는 독일은 버틸 수가 없었다. 독일이 장차 망하지 않으려면 빨리 소련 서부를 점령해야만 했다. 독일 국민은 슬라브족의 국가를 좀 점령하는 것은 게르만족의 국가인 영국과 교섭을 벌이면 양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임무를 맡은 헤스가 자신이 비행기를 몰고 영국으로 갔다. 그러나 영국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영국과의 화친을 포기한 독일이 소련 공격에 나섰다.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는 것에는 꽁무니를 뺀 독일 장성들이 소련과 전쟁을 벌이는 것에는 앞장을 섰다. 그들은 소련군과 싸워 이기고 동유럽을 점령할 수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과연 초반에 독일군이 소련군을 궤멸시켰다. 물자가 부족한 독일이 영국, 소련과 전쟁을 계속 벌이려면 점령한 지역의 슬라브족 주민과 국내의 유대인, 집시들을 몰살시켜야만 했다. 이 일은 독일 전국민의 소망이지만 자신들의 이름으로 그 일을 집행할 수가 없는 파워엘리트들이 히틀러, 괴벨스, 괴링, 히믈러의 이름을 빌려 집행했다. 이들이 그것을 허용해준 첫 번째 이유는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모자라는 인간들인 그들이 자신들의 명령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을 집행한다는 자부심에서였다. 세 번째 이유는 비록 자신들이 국가 최고 지도자 자리에 있지만 여태까지 국가 대사는 모두 파워엘리트들의 지시에 따라 처리했는데 여타민족을 말살시키는 일만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는 국가 대사라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게르만족이 여타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자 전세계의 식자들이 독일을 비난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에 물자를 지원해주자, 초반에 궤멸한 소련군이 회생했다. 그러자 군수물자가 부족한 독일군이 수세로 몰리게 되었다. 미국, 영국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독일 군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무조건 항복하면 자신들도 히틀러 그룹과 함께 처형당하고 말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 국민이 영국, 소련과 끝까지 싸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이 소련인들을 잔혹하게 죽이듯 독일인을 죽이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 국민으로서는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군부 엘리트 소수가 여기에서 전쟁을 끝내려면 히틀러를 죽여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지금 국민이 그를 떠받들고 싸우고 있으므로 그만 죽이면 모두 흩어지고 말 것이었다. 그러면 군부 강경파 엘리트들이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군부 소수 엘리트들이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의 군대와 영국, 미국의 군대가 양면으로 독일로 쳐들어왔다. 시야가 좁은 독일 국민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영국을 극도로 증오한 그들이 항복을 거부했다.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히틀러, 히믈러, 괴벨스가 자살했다. 살아남은 그 그룹과 이들과 가까운 파워엘리트들은 모두 군사재판정에 회부되어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유럽의 유고지역 민족 차별의 사례
복잡한 나라 유고연방의 강력한 두 세력은 독립을 원하는 크로아티아와 분리를 반대하는 세르비아였다. 세르비아가 분리를 반대하는 이유는 자기네들이 주도세력이란 인식이 바탕으로 있었지만 그들은 J.B.티토가 크로아티아인이지만 그를 지도자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개방적인 편이었다. 유고사태는 1920년대에 이미 노출된 이들의 대립이 티토의 등장으로 잠잠해졌다가 사후에 다시 심각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세력이 충돌하던 곳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에서 였다. 이곳은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이 각각 절반을 차지하며 살고 있었다. 서로 노력하여 감정을 안다스리면 언제든지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불씨를 간직한 땅이었던 것이다.
유럽엔 A라는 나라에 살면서 B라는 나라의 언어, 풍습을 고집하는 대소 민족집단이 너무나도 많다. 집단으로 일정지역에 거주하면서 방송과 신문까지 자기네 언어를 고집하는데 더 놀라운 건 독립국가를 가져본 적도 없는 역사 없는 민족집단까지도 자기네 언어와 문화를 고집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분리와 독립을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나라마다 골치가 아픈 다민족을 포함하게 된 건 강력한 제국의 지배 때문이었다. 오스만제국, 합스부르크가, 신성로마제국, 칭기즈칸 등은 대항하는 여러 민족을 지역별로 뭉치게 하여 독립까지 이어지도록 하였다.
특히 심하게 나타난 중부유럽의 이런 현상은 규모가 작은 경우 다민족 국가가 되었지만, 세력이 컸던 경우에는 자치주와 자치공화국, 공화국 순으로 구별되었다. 일부는 연방국가를 만들어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장래 등장할지 모르는 하나의 유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연방제 국가는 보통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늘 개혁의 주도자였다. 체제 중심보다는 다분히 인물 중심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사라지면 연방제는 항상 위기를 맞곤 했다. 분열의 불씨를 찾으려고만 하면 언제나 도처에 있는 것이었다. 집단지도체제는 일종의 위기 관리에 불과하며 진정한 해법은 안되었다. 경제 지역간의 격차나 인재등용에 있어서는 민족차별이 가장 큰 불씨가 되어 강력한 지도자인 티토가 사라진 유고슬라비아에서 그 대표적인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유고연방의 요리는 맛도 좋고 양도 많고 값도 싼 편이다. 주로 고기요리 중심이어도 아드리아해에서 풍성하게 잡히는 해산물 요리도 먹음직스럽다. 갈아낸 고길 포도 잎이나 양배추에 싸서 만든 사르마나, 꼬치에 꿴 돼지고기 요리 라즈니치, 그리고 가지와 고기를 오븐에 넣어서 구운 무사카 등이 향토적인 요리이다. 이 밖에도 듬뿍 향료를 넣어서 만든 요리가 있다. 유고슬라비아는 세계 10위 와인을 생산하는 국가이지만 주로 크로아티아에서 양질의 포도주가 생산되기에 소개하기가 그렇다. 까베르네, 라스키 리슬링 등이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본사를 두고서 생산되는 세계적인 상표로 자그레브는 이미 독립한 크로아티아의 수도이다.
베오그라드에선 터키식 커피를 맛보는 것도 좋다. 고운 가루로 만든 커필 냉수로 천천히 끓여서 여과하지 않고 컵에 넣어서 그 윗부분의 맑은 부분만 마신다. 이슬람권에서 널리 적용되고 있는 방식이며 처음엔 약간 써도 매우 감미롭고 향긋한 뒷맛이 기분을 좋게 만든다.
중남미는 중세기 이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화하여 라틴계 지배 나라들이란 색깔이 짙은 편이다. 지역적으로는 멕시코부터 시작되어 중미와 남미대륙, 그리고 카리브해상의 많은 섬들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남미 대륙은 우리나라와는 가장 먼거리에 위치하여 지구 뒷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카의 서부와 캐나다를 종단하는 로키산맥이 멕시코로 뻗어 있으며, 여기에서도 상당한 고도를 가진 화산대와 연결된다. 이것은 다시 남쪽으로 뻗어서 남미대륙의 서해안에 이르러 안데스산맥이 되고, 안데스산맥은 칠레의 아구아를 비롯하여 평균 4천 미터 높이를 가진 고봉들이 있어서 열대에 속하지만 연중 눈이 쌓이고 있다.
남미대륙의 평야는 광활하며 브라질의 아마존강과 같은 강 유역에 발달되어 있다. 북미는 경제적이나 지리적으로나 위력과 규모가 제일 큰 나라들인데, 캐나다와 미국 뿐이다. 캐나다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이 매력있다. 푸른 잔디와 아름다운 꽃밭으로 둘러싸인 호텔과 장엄하게 펼쳐진 로키산맥, 거울같은 호수, 익사이팅한 급류, 대평원 속을 계속 달리는 평탄한 도로 그리고 발달된 교통 등과 같은 관광시설과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가 스위스에 견줄만 하다. 아메리카합중국은 과학, 경제, 정치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리더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성장하였다. 미국은 본토 48개 주에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합쳐서 총 50개 주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를 반겨 준 온화하고 평화스러우며 매우 단순한 사람들은 5월 카스틸랴만큼이나 아름다운 정원들과 함께 푸른 숲이 울창하고 샘물이 풍부한 바하마제도의 주민들이었다. 그렇지만 함대 사령관은 이곳이 그가 찾던 땅이 아니었으며, 그 땅에 그를 붙들어 둘 만큼 부에 대한 약속을 제시하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간 그 스페인 선박들은 남쪽으로 순항하여 카리브해의 여러 섬을 방문하였는데, 여전히 금과 양념류를 찾으며 가는 곳마다 영토를 조사하였다. 그러면서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 관해서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알게 되었던 한 가지 사항은 그 주민들은 유럽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여러가지 식품들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썩은 나무에서 번식하는 흰벌레나 크고 통통한 거미, 부패한 물질까지도 먹었다. 열대 아메리카의 주민들은 사실 그 위도에서 풍부히 번식하는 살찐 곤충을 먹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었다. 용설란 벌레는 아즈텍 궁전에서도 즐기던 진미였으며, 20세기 멕시코에서도 여전히 맛있게 먹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람들은 카사바를 대단히도 열광저긍로 받아들였는데 심지어 밀로 만든 빵보다도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미식가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카리브해 주민들은 이상한 빵들과 혐오스러운 곤충 말고도 유럽인 항해자들이 이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여러가지의 다른 식품들을 먹었으며 고구마 같은 뿌리 음식이나 다양한 콩들도 먹었다. 그 외에도 야생조류와 생선, 게 등도 풍부하였다. 파나마의 주민들은 특별한 종류의 작은 생선을 저장하는데 능통하였는데 그들은 잎사귀에 그것들을 감쌌다. 마치 약사가 종이에 약분말을 말 듯이 했는데 그 다음에는 오븐에서 말린 후 장기간 보존하였다. 거기엔 또 많은 과일들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로부터 발효음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동은 기자 deyuh@mydaily.co.kr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