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잠실 윤욱재 기자] '봉의사' 봉중근(38)이 정들었던 유니폼을 벗는다.
봉중근은 28일 잠실야구장 VIP실에서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은퇴 소감과 향후 계획 등을 밝혔다.
봉중근은 신일고 재학 중이던 1997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웠다. 2002년 애틀랜타에서 빅리거로 데뷔한 봉중근은 신시내티 레즈를 거치면서 통산 7승 4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5.17을 기록했다.
결국 미국 생활을 접고 2007년 LG 트윈스에 입단, 한국으로 돌아온 봉중근은 2008년 LG의 에이스로 급부상하면서 KBO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우뚝 섰다.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한 봉중근은 2012년부터는 마무리투수로 전향해 2013년 38세이브를 거두며 팀이 11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KBO 리그 통산 성적은 55승 46패 109세이브 평균자책점 3.41.
또한 국가대표로도 맹활약해 한국 야구 팬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멤버로 활약한 봉중근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09년 WBC,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등에서 태극마크를 달았다. 특히 2009년 WBC에서는 견제 동작으로 스즈키 이치로에 굴욕을 안기기는 등 일본전 필승에 앞장서며 '봉의사'란 애칭도 생겼다.
화려한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도 어느덧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난 해 어깨 수술을 받고 재활에 매진했지만 결국 올 시즌 마운드에 서지 못했고 끝내 은퇴를 선언했다. 이제 '제 2의 야구 인생'을 개척할 그의 앞날이 기대된다.
다음은 봉중근과의 일문일답.
- 힘든 결정이었을텐데 언제 은퇴를 결정했는지.
"나는 두 차례 수술을 한 선수다. 나이가 걸림돌이 됐지만 수술을 하면서 또 한번의 재기를 할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다. 훗날 후배들이 고참이 됐을 때 나 같은 상황이 또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재기를 하면 후배들이 용기를 내고 더 오래 야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재기가 힘들었다. 지난 7월 라이브 피칭까지 마쳤고 자신감을 얻어서 경기 일정을 잡으려 했는데 또 재활을 해야 했다. 그때부터 스스로 더 버티는 것보다 엔트리 하나라도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맞다고 생각을 했다"
- 제 2의 인생에 대한 계획은.
"평생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 내가 워낙 LG를 사랑했고 이상훈 코치님을 보면서 야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LG에 너무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평생 LG를 사랑하면서 야구 쪽에서 큰 꿈을 이루고 싶다"
- LG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계획도 포함이 돼있을 것 같다.
"구단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감사하다. 많은 선수들이 은퇴하고 야구장을 떠날 때 안타깝게 떠나는 선수들도 많은데 그런 부분에 나는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은퇴를 말씀드렸는데 '생각을 더 해보라'는 말씀도 해주셨고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자'는 말씀에서 감사를 드린다. 시즌이 종료된 후 다시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 결국 LG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됐다.
"미국에서 이병규 코치님의 은퇴식을 봤는데 코치님도 그런 부분이 가장 아쉬우셨을 것이다. 프로에서 목표가 당연히 우승이 아니겠나. 우승을 못하고 은퇴를 하게 됐는데 그게 가장 마음에 걸린다. 팬들에게도 가장 죄송스럽다. 조만간 LG가 우승하는 장면을 봤으면 좋겠고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LG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입단할 때가 기억이 남는다. 2013년 시즌 최종전에서 두산을 이기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것처럼 다들 눈물을 보였다. 그때 우승을 할 것이라 믿었는데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LG에 있으면서 그 경기가 가장 자랑스럽고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 국가대표로도 맹활약했는데.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온 국민이 보는 경기에 나가는 것이라 아직도 내가 몸이 괜찮다면 욕심을 낼 정도로 의미가 크다. 내 인생에 봉중근이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는 큰 기회였다. 2009년 WBC에서는 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선수도 아니었다. 팀에게 도움만 주자는 생각이었다"
- 2009년 WBC 일본전 당시 심판에게 한 말은.
"투 머치 플래시(Too much flash)였다. 박경완 선배님과 미리 이야기를 했고 사인을 내주면 타임을 불러서 주심에게 이야기를 하려했다. 어떻게든 이치로를 괴롭히고 싶었고 심판도 미국인이라 내가 그 정도 영어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심판과 친해지고 싶었다. 투수에게 큰 부분이다. 볼을 줄 것을 스트라이크를 주는 1%의 바람으로 어깨를 스킨십하면서 내가 가진 영어를 다 했는데 어쨌든 그게 통했던 것 같다.(웃음)"
- LG의 암흑기 시절 에이스로 활약했다.
"2007년 많은 주목을 받고 LG에 입단했고 첫 시즌부터 선발로 시작했다.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했는데 역시 한국 타자들이 너무 정교하고 선구안도 너무 좋았다. 힘들었던 한 해였다. 그해 마무리캠프에 가서 미국에서 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식으로 운동을 했고 옆에서 코치님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특히 김정민 코치님이 직접 피칭을 받아주시면서 내가 생각 못했던 한국 타자들의 습성 등을 분석할 수 있었다. 에이스라고 불렸던 시기여서 뿌듯했다"
- 당시 '봉크라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좋은 별명이든 나쁜 별명이든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다. '봉미미'라는 별명도 아직까지 듣고 있지만 나는 너무 좋았다.(웃음) '봉크라이'는 잘 던지고도 승수가 모자랐다는 뜻으로 붙여주신 별명인데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어도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은 '봉의사'다. 야구하면서 가장 뿌듯한 별명인 것 같다.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이 지어준 별명이기 때문에 훗날 대대로 이어질 수 있는 자랑거리라 생각한다"
- 후배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최근에도 선수들과 밥도 먹고 통화도 나눴는데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특히 (정)찬헌이도 마무리투수를 하면서 분명히 고비는 올 것이라 봤는데 그럴 때마다 블론세이브를 하더라. '그 어느 마무리투수라도 1년에 5~6개는 한다'는 등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었다. 찬헌이는 심장이 튼튼한 선수다. 분명히 언젠가 마무리투수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힘든 시기가 왔지만 분명히 LG에서도 최다 세이브를 할 수 있는 선수가 될 만큼 기대를 하고 있다"
- 류현진과 친분이 깊은데 서로 나눴던 이야기는.
"'형, 더 던져'라고 하더라. 며칠 전에도 통화를 했는데 처음엔 믿지 않았다. 사실 어깨 수술과 재활 과정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를 했다. (류)현진이가 '던지면서도 아팠는데 참을 수 있을 정도였고 그래서 던졌다'라면서 '어느 순간 믿음이 생기고 잘 됐는데 형은 왜 안 되느냐'고 하길래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프다'고 했다. 현진이가 많이 슬퍼했다. '은퇴할 때 한 타자라도 더 던지라'는 말에 울컥했는데 선후배를 떠나 진심을 다해 이야기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사진 = 잠실 곽경훈 기자 kphoto@mydaily.co.kr]
윤욱재 기자 wj3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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